“관음증적 본능과 매스미디어의 위력이 개인을 얼마나 파괴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한 세기가 끝나가고 있다. 이제 또 한 세기가 시작될 것이다. 현재와 다가올 미래를 이어주는 것은 영상 정보화사회의 거대한 미디어 제국이다. 과연 새로운 세기에서도 우리의 일상적 삶은 미디어 제국에 충실하게 복무하는 소모품의 역할을 다할 것인가, 아니면 우울한 테크놀로지의 비극적 종말을 목격하게 될 것인가.
  ‘1984’의 빅 브러더는, 조지 오웰의 상상공간에서 창조된 괴물이지만 또 하나의 전체주의 사회로 끌고 가는 영상정보매체의 위험을 날카롭게 경고하고 있다. 얼마나 많은 정보를 획득해서 그것을 창조적으로 활용 하느냐가 삶의 질을 결정하는 영상 정보화 사회에서는, 누구나 새로운 정보를 생명수처럼 갈구하게 된다. 그러나 수용자의 능동적 의지에 의해 새롭게 변형되거나 창조적으로 활용되지 않은 정보는 쓰레기 더미에 불과하다.
  파편적이고 때로는 상호모순적이기까지한 이 정보만으로 조립된 삶은, 마이더스의 황금의 손이 아니라, 보이는 쇠붙이마다 잡아먹어야 하는 불가사리의 무서운 탐욕에 다름 아니다.
  피터 위어 감독의 ‘트루먼 쇼’는, 타인의 삶을 엿보고 싶어 하는 인간의 관음증적 본능과 영상 매스미디어 제국의 가공할만한 위력이 개인의 자아를 얼마나 파괴할 수 있는가를 섬짓하게 보여주고 있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 이 세계는 하나의 어항이고, 나의 삶은 유리고기처럼 투명하게 노출된다. 그러면 나는 누구인가, 나의 삶은 무엇인가?

  영화에서 짐 캐리의 변신은 높이 사줘야 한다. 자신이 구축한 연기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은 위험한 시도이다. 자칫 발을 잘못 디디면 다시는 기어 나오지 못할 생존율 제로의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의 연기적 변신도 훌륭하였지만, 그것보다는 새로운 영역으로 뛰어드는 그의 모험정신 자체가 더 소중하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블랙코미디의 걸작 근처에까지 갔다가 주저앉았던 ‘케이블 가이’의 안타까운 시도가 ‘트루먼 쇼’에서는 훌륭하게 열매를 맺었다.
  주제를 심층적으로 더 밀어붙이지 못한 아쉬움은 있다.
  그러나 인디 영화가 아닌, 거대 상업자본이 투입되고 다수의 대중이 즐길 수 있는 영화를 의무적으로 만들어내야 하는 주류 할리우드 영화공장에서, ‘트루먼 쇼’는 최고의 생산품 목록의 하나로 기록될 것이다.
  트루먼이 살았던 마을 씨헤븐은 넓은 의미에서 인류가 살고 있는 이 지구가 아닐까? 지구 밖에서, 마치 TV의 쇼 프로그램 ‘트루먼 쇼’의 연출자가 트루먼을 바라보듯이, 우리들의 삶을 낱낱이 지켜보고 있는 그, 그는 누구인가. 그리고 또 ‘트루먼 쇼’를 보는 관객들, 영화 속에서 관음증적 욕망을 충족 받고 있는 ‘트루먼 쇼’의 시청자들과 동일시되는 그들 역시,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역시, 또 한사람의 트루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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