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문단 상반기 문예작품평

소설 전도의 집중적 효과 못 얻고
콩트는 기본적 정석 없어
시 재능 있으나 난해한 시적구도
자기목소리와 표현 조화 못해

  友情的(우정적)인 몇 마디의 참견
  <友情批評(우정비평)>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본격적인 것이기 보다 아마추어리즘에 가까운 것이고, 이론적인 것이기 보다 심경적인 것이며 완곡하기 보다는 적절한 것이요, 정중한 비판이기 보다 허물없는 충고에 가까운 것이다. 내가 지금 수업 중에 있는 후배들의 작품에 관하여 말하고자 하는 의도 역시 이러한 우정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데에 있다. 신인들의 작품을 이야기할 때 가장 우려되는 사실은 그들이 비평에 대한 反應方式(반응방식)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가령 직업비평가가 칭찬을 아끼지 않았을 경우 신인은 우쭐해 버린 나머지 더욱 추구해야 마땅할 자기의 세계를 포기하게 되고, 신인에게 무자비하리 만큼 가혹한 비평이 가해졌을 때는 의기소침하여 문학적 방향을 상실하게 되는 경우도 허다한 것이 사실이다. 나의 이러한 비평의 결과적 체험은 다소 간의 차이는 있을망정 이른바 기성문인에게도 적용되는 것이 통례였고, 그것은 이론의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항상 비평을 서제스티브하게 하거나 망설이게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는 것이 확실하다. 신인이거나 기성작가이거나 간에 내가 가장 바라고 싶은 것은 자신에 대해서 가해지는 비평에의 완전한 무시이다. 비평을 무시하라는 말이 너무 과격하다면 적어도 비평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자신을 훈련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작가의 문학적 긍지가 비평가의 판단에 우왕좌왕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처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물며 나의 우정적인 몇 마디의 참견이 정중하고도 의례적인 비평으로 후배들에게 받아들여진다면 그것은 아마도 나의 중대한 과오이거나 실수이기 때문일 것이다.

  詩(시)
  이 글을 쓰는 이유의 한가지로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또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東大新聞(동대신문)’과 동인지 ‘實驗(실험)’ 등의 발표지에 나타나 있는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로 사이비, 또는 사이비에 가까운 현대의 난해시들과 그 경향이 거의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바로 그런 점에 대하여 나는 상당한 우려와 불만을 지금까지 가져왔던 것이다. 지극히 모호한 것이기는 하지만 대학의 전통이라는 것이 무시될 수 없을 만큼 문학적 형태의 均齊(균제)를 형성하는 것이 대부분이며 그런 점에서도 잘못 이끌려서 가는듯한 동국문학의 흐름에 대해서 적어도 무관심할 수는 없다는 것이 나의 솔직한 고백이다.
  가령 李明柱(이명주)의 ‘作業(작업)ㆍ3’이라는 작품은(3월16일자)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이미지와 언어로 충만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머리 숲의 어지러운 손을 떠난다.> <어둠의 질긴 가시에 찔려> <자주 죽고 싶어 하는 피를 건져내며> <古代(고대)의 선선한 感傷(감상)> 등의 구절은 아주 흔하게 체험할 수 있는 현대의 사이비 난해시들에서 역시 자주 볼 수 있는 구절들과 매우 유사하다. 도대체 ‘자주 죽고 싶어 하는 피’는 어떤 피이며 그것을 <건져낸다>는 것은 또 어떤 의미를 갖는가? <머리 숲>과 <어지러운 손>은 어떤 의미이며 새로운 인식의 표현이라고 할 때 어떤 인식에 해당되는가? 그것이 사이비 난해시인들의 이야기를 빌린다면 <言語(언어)를 통한 人間(인간)의 救濟(구제)>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는 인간의 구제인가? 단 그것이 가능한 문제인가? 그것이 시의 정도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연속적인 질문을 유발하고도 남는다. 시의 전체적인 구도는 충분히 빛나는 感性(감성)과 시의 才能(재능)을 느끼게 하면서도 <어둠의 질긴 가시에 찔려>라고 말하는 태도에 불만이, 무의미한 유행적 문학에 접했을 때 다가오는 그런 불만이 그대로 포기되지 않는다. 權鎭洙(권진수)의 ‘겨울밤바다’ (4ㆍ16일자)는 제목에서부터 유행적인 시풍을 기탄없이 느끼게 하고 그 내용 역시 그런 느낌을 배반하지 않는다. <內室(내실)의 구조는/ 孕胎(잉태)의 追跡(추적)처럼 그렇게 形成(형성)된다> <지나간 日常(일상)의 불을 지피며/ 파도와 바람이/ 훨훨 타오를 때> 이런 시구는 도저히 자기의 목소리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흔해빠진 표현이고 애매하고 상투적이며 얼마든지 젊은 시인들의 작품에서 구경할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언어들이다. 羅赫採(나혁채)의 ‘拒逆(거역)’(4ㆍ23일자) 方(방)석준의 ‘創世紀(창세기)의 별’(5ㆍ7일자) 崔淳烈(최순열)의 ‘片紙(편지)’(5ㆍ21일자) 申鉉敦(신현돈)의 ‘律(율)’(6ㆍ4일자) 역시 權鎭洙(권진수)나 李明柱(이명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시적才能(재능)을 충분히 느끼게 하면서도 왜 그토록 파악할 수 없을 만큼 모해한 詩的(시적) 構圖(구도)를 만들었어야 했는지, 그 必然性(필연성)에 대하여 심한 회의를 갖게 한다.
  시란 나의 생각으로서는 철저하게 개성적일 필요가 있고, 또 원래가 그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시가 개성적이라고 할 때, 누가 시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하였든지 간에 <다만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면 자신의 그러한 필연적 요청에 의하여 쓸 수밖에 없다. 문제는 자신의 필연적인 시적 요구가 어느 정도 시적 보편성을 획득하는가하는 문제일 뿐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동국문학이 전적으로 오도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은 전혀 아니고 한국 현대시의 중요한 한 조류와 오히려 더욱 관계된다. 가령 崔淳烈(최순열)의 ‘出發(출발)’(3ㆍ23일자)같은 작품은 자기의 목소리를 찾아보려는 노력이 강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지금까지의 어떤 경향에 대한 총체적인 반성의 일부가 내포되어 있는 듯도 하다. <정직한 自由(자유)와 부끄러운 學問(학문)을/ 世紀(세기)의 死者(사자)들이 오히려 부러진/ 잇발을 들내보이고 있을 때 우리는 치솟는다. / 2콤마 零(영)의, 이 분노의/ 꼿꼿한 눈으로 하여/ 보아라, 우리는 보아라> 이런 시구에서 <死者(사자)의 부러진 잇발>등의 구절이 보여주는 미숙성이나 낮은 차원의 形象性(형상성) 문제는 그대로 용인되어야할 문제들이다.
  그것은 <말하고자 하는 것>이 표현문제의 優位(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표현과 형상성의 미숙이 어떤 경우든지 용인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한 때 동국의 시인들이 未堂(미당)의 시를 지나치게 흉내를 낸 적이 있었고 아직도 그런 시인들이 없지 않은 것도 확실하다. 그들 未堂(미당)의 아류들에게서 가장 훌륭한 것이 표현의 완숙에 있다. 완숙미가 지나쳐서 사통오달한 노인의 시구 같았다. 그 <애늙은이들>에게서 가장 냄새가 나는 표현의 문제였다. 완숙된 듯한 그러나 전혀 자기의 발성법을 가지고 있지 못한 그런 시들이었다. 그것을 나는 가장 저질한 표현의 미숙성이라고 생각한다. 그 미숙성이 지금은 또 다른 악취를 조금씩 풍기고 있다. 예술가다운, 시인다운 긍지가 있다면 죽을 때까지 단 한 줄의 시를 겨우 남긴다 하더라도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내야 할 것이다. 스승의 톤, 유행적 가락을 배반하는 시인이 아니고서는 스승에 대한 예의는 물론 자신의 길을 찾는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散文(산문)
  4편의 콩트와 2편의 단편을 읽고 첫째로 느껴지는 것은 이들 작품이 거의 私小說(사소설)이라는 것과 콩트의 기본적인 定石性(정석성)이 거의 보여지지 않는다.
  趙大衍(조대연)의 ‘入口(입구)에서 出國(출국)로’ 文元子(문원자)의 ‘生日(생일)’ 許丙圭(허병규)의 ‘어떤始作(시작)’ 徐賢碩(서현석)의 ‘稿料(고료)’와(이상 콩트) 金仁默(김인묵)의 ‘外出(외출)’(短篇(단편)) 등의 작품은 주인공이 일인칭인 <나>이며 사소설체의 신변잡기 같은 작풍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일인칭의 소설이 敍述(서술)의 방법에서 용이하다는 이점이 있으나 대체적으로 그런 효과는 거둬지지 않은 느낌이다. 특히 콩트가 ‘生日(생일)’을 제외하고는 콩트다운 맛이 전혀 없다. 짧기만 하면 콩트가 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사건의 말미가 갑자기 급격한 전도(뒤집힘)를 보여줌으로써 획득할 수 있는 집중적 효과를 얻지 못하고 있고 소설의 내용이 트리비얼한 제재에 격심한 지배를 받아 작품의 격조가 무척 떨어지고 있는 느낌을 준다. 특히 ‘外出(외출)’의 여주인공은 상투적이고도 몰지각한 부르주아풍의 생활정도를 넘지 못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文章力(문장력)이나 구성력에 솜씨를 보여준 ‘白血戰爭(백혈전쟁)’의 李種暎(이종영)은 물론 ‘로마네스크’와 제재의 문제에 보다 더 노력하여야 될 것이고 소설의 기초적인 결함에 대해서도 보다 더 주의를 기울여야 될 것이다.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