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대, 불교계의 혁신기 동대불교 한국 근세 60년사와 같이 성장

  1940년대를 전후한 시기는 우리 불교 학계의 성숙기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발표된 논문들은 전통적인 연구태도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것이었다. 곧 역사학, 문헌학, 언어학 등 불교연구의 기초적 방법론에 의거한 논문들이었다. 또한 그것들은 단편적인 소개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완결된 논문형태로 되어 있다.
  1932년에 발표된 것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김법린 씨의 ‘唯識二十論(유식이십론)의 연구’와 허영호 씨의 ‘大小品般若經(대소품반야경)의 成立論(성립론)’과 작년까지 본교에 재직한 林錫珍師(임석진사)의 ‘普照國師(보조국사)연구’를 주목해 볼 수가 있다. 김법린 씨의 논문은 ‘산스크리트’원전과 한역을 대조하며 그 현대어역을 시도한 것으로 이미 그 때 직접적인 건전연구가 우리 학계에서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허영호 씨는 그의 논문을 통해 오늘도 중요한 연구과제로 되어 있는 반야계통의 경들에 대한 일대 계보의 작성을 시도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서구의 연구결과들을 자유로이 이용하면서 난삽한 반야경 성립을 추구하고 있으니 오히려 오늘날의 연구태도와 자세가 그것에 미치지 못한 감을 느끼게 된다. 임석진 씨의 연구 역시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고승에 관한 연구가 흔히 개인의 전기나 하나의 저술의 대한 주해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실제인 데 그의 논문은 보조의 사상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있다. 그의 이 연구는 불교대학장을 지낸 김영석 박사의 ‘佛日普照國師(불일보조국사)’ (1942년)와 그 후 불교학보 2집(1964년)에 실린 ‘佛日普照國師(불일보조국사)’의 선구적인 연구가 되고 있다.

  한편 혜화전문교수로 있던 姜裕文(강유문)씨의 ‘최근 백년간 朝鮮佛敎槪觀(조선불교개관)’도 이 때 발표되고 있었으니 그의 유고인 ‘조선불교 年表(연표)’와 함께 한국불교사에 대한 관심의 최적한 표현이 된다.
  전자는 1832년 (이조순조)에서 1932년까지를 하나의 전환적 시기로 잡아 이조억불정책이 승려도성출입을 계기로 불교계가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쳐 왔는지를 극히 객관적인 입장에서 평가하고 있다. 그는 일본불교가 우리에게 전파되면서 일어난 복잡한 사태에 대해 상세한 사실을 전해주고 있으니 예컨대 1908년에 탄생된 圓宗(원종)종무원이란 일본의 曹洞宗(조동종)과 연합맹약을 맺음으로 賣宗的(매종적)인 행위를 한 어용단체임을 지적하고 있다. 당시에 이러한 역사적 관점을 지닌 글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상찬할 만한 것이었고 그의 이 글을 확실히 한국 불교현대사의 첫 시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불교년표’ 역시 우리로서는 현대적인 불교사편집의 효시가 되고 있다.

  불교학의 여러 분야 가운데서 한국불교에 대한 관심은 실로 광범위한 것이었다. 중요하게 언급되어진 논저들의 내용들도 대부분이 이 분야의 것이었지만 1942~3년에 발표된 허영호의 ‘원효불교의 재음미’ 金映遂師(김영수사)의 ‘태고화상의 宗風(종풍)에 대하여’ ‘조계종과 傳燈通規(전등통규)’ 등도 한국 불교에 관한 것이었다.
  특히 조계종에 관한 것은 한국불교의 法通(법통)인 曹溪宗史(조계종사)를 다루고 있으며 그것은 후에 발표된 김영수師(사)의 대표적인 연구인 五敎兩宗(오교양종)이나 九山成立(구산성립)에 대한 첫 시도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연구방향이 그리로만 전개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현 불교대학 교수인 김동화 박사의 ‘대승불설론의 재음미’나 ‘대승불교의 사상적 고찰’ 등 불교의 일반 사상에 관한 연구도 발표되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중앙불전과 惠化專門(혜화전문)의 교과과정에 나타난 강의 제목은 불교학 전반을 ‘커버’하는 광범위한 내용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이 시기의 불교학계의 동향은 외국학계에서 발표된 논문들의 번역소개를 통해서도 찾을 수 있다. Har Dayal의 ‘보살사상의 기원과 발달’ Winternitz의 ‘원시불교에 있어서의 我(아)와 無我(무아)’ 또는 Oldenberg의 ‘율장서설’ 등의 번역 논문은 우리 학계의 방향을 알려주는 측면적인 내용일 수가 있다.
  실로 우리는 이 시기에 불교의 성숙한 결실들을 보게 된다.
  그러나 1940년 이후의 불교계는 학적인 결실과는 달리 주목해야할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 소위 대동아전쟁의 발발이 그것이었다. 이 역사적인 사건은 불교계에도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이 때 불교지에 나타난 시사적인 글들은 그들의 전쟁을 합리화시키는 내용의 것이었다. 1944년 전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불교적 관점에서 그들의 입장을 지지하는 논설물들이 부쩍 늘어났다. 그것은 불교계만이 처한 입장은 아니었으니 어쩔 수 없는 사정이었다.

  드디어 해방과 독립을 얻은 우리는 새로운 차원에 들어섰다. 불교계도 일대 혁신을 보게 되었으니 외관상 변화는 1940년 이래 혜화전문학교로 내려오던 본교가 동국대학으로 승격되었고 민주주의 교육이 실현되었다. 서구의 諸(제)사조도 발맞추어 물밀듯 들어왔다. 불교계도 새로운 질서를 위해 진통하고 있었다. 이 진통은 얼마간의 혼란을 빚어냈고 따라서 실질적인 학문 활동은 거의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다. 그 가운데도 ‘원측의 저서와 사상’(1946년ㆍ조병기)이 진단학회를 통해 발표되었다. 이 시기에 풍족한 업적들을 접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해방의 열광에서 온 혼란이 안정될 즈음 다시 6ㆍ25라는 민족수난은 불교계에 또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피난지인 부산에서 동국대학은 문을 열었고 연구는 계속되었다.
  그 결실들이 점차로 나타나게 되었으니 김동화 박사의 ‘고구려 시대의 불교사상’ (1959년) ‘신라시대의 불교사상’ ‘백제시대의 불교사상’ (1962년)이 아시아 연구지를 통해 발표되었다. 그것은 3부작의 성격을 띤 것으로 한국불교사가 흔히 역사적 기술에 그치는 점을 지양하여 사상적인 면에서 전개하고 있다. 이 논문들은 성실론, 3론, 섭론 등 소위 중국에서 전래된 사상이 삼국시대에 어떻게 애용, 발전됐는지를 사상적인 특징을 들어 개관하고 있다. 뒤이어 발표된 ‘고려시대의 불교사상’은 바로 이 3부작을 잇는 논문이 되고 있다.

  1960년에는 김영석 씨의 ‘華敎學槪論(화교학개론)’이 나왔고 1962년 조명기 씨의 ‘신라불교의 이념과 역사’ 1964년 ‘고려 대각국사와 천태사상’이 각기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신라불교의 이념과 역사’는 한국불교의 꽃을 피운 신라시대의 고승들의 저술과 사상을 총망라하고 있다. 원효, 의상, 원측, 태현, 경흥의 저서를 열거하고 그 중 현존본에 대한 해제를 붙이며 또한 그들의 사상적 특징이 인도가 중국과 어떻게 다른 것인가를 부각시키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개별적인 연구실적들이 1962년에 설립된 불교문화연구소를 중심으로 더욱 활발하게 전개됨을 본다. 그것은 지금의 연구 활동을 촉진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기관지인 불교학보의 계속적인 출간에 실질적인 내용이 된다. 이와 함께 1963년에 설립된 비교사상연구소의 활동은 불교연구의 새로운 경향을 나타나게 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1966년에 개최된 ‘한국근대화의 이념과 방향’이란 ‘심포지엄’은 불교가 한국근대화 과정에서 담당할 역할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으니 불교와 현대사조 불교와 사회과학 등 불교의 응용학을 꾀하고 있다.
  60여년의 전통을 가진 우리 불교학의 전통은 실로 한국근대사의 60여년과 동일한 의의를 갖고 있다. 좌절과 재기의 연속이 그것이다. 또한 시대적인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요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항상 底邊(저변)에는 일관된 흐름이 있었으니 그것이 오늘 한국에서의 불교인구의 중심지로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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