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악에서 윤혜경 기자였습니다”

나는 뻔한 영화 속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는 안전한 카타르시스에 왠지 모를 창피함을 느낀다. 그런 편한 인생은 내 적성이 아니었나보다. 소위 수능시험에서 삼수라는 혹독한 경험 뒤에 시작한 내 대학생활은 ‘식스티나인’의 유쾌 발랄 청춘도, ‘밑줄 긋는 남자’ 속 로맨틱한 도서관 연애 역시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그저 그런 반복된 생활 속에서 우연히 지나친 동대신문사 포스터를 보며 변화를 필요로 한 내 몸이 저절로 움직였던 것일까. 어느새 손에 들린 입사지원서가 예고된 고난의 시작이란 것을 알지 못한 채, 합격통보에 기쁜 마음만 가득했다.

나의 고된 신문사 생활은 떨리는 마음으로 나갔던 첫 취재부터 시작됐다. 기자의 시대정신을 묻는 갑작스런 한 취재원의 질문에 긴장한 난 제대로 답하지 못해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또한 ‘어린 학생들이 얼마나 알겠어?’ 라며 학생기자로서 알 권리를 무시조로 일관하는 일부 취재원의 태도에는 미숙한 대응으로 진땀 빼기 일쑤였다. 이렇게 기자라는 이름으로 교직원, 교수, 학생 등 다양한 취재원과 만나서 부딪히는 과정은 나에게 있어서 여전히 넘어야 할 산과 같다.

수습기간 동안 취재 후 화장실에 들어가 울먹임을 추스르곤 하던 내가 요즘은 조금 여유 있는 모습으로 사람들을 만난다. 어렵기만 했던 취재원과의 장시간 인터뷰도 능숙하게 해내는 모습에 조금은 성장한 나를 볼 수 있다. 그렇게 모든 단어 속 ‘처음’의 뜻처럼 좌절과 설렘을 동시에 체험하며 보낸 수습기자로서의 한 학기는 이젠 내 자신도 대견해 하는 뿌듯한 추억이다.

동대신문 기자로서 때로는 눈물 났던 경험들도 훗날 “지리산 노고단에서 윤혜경 기자였습니다” 라고 말하는 ‘방송기자 윤혜경’ 으로의 초석을 다지는 중요한 경험이 되 줄 것이라 믿는다.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한 대 맞으면 기필코 두 대 로 갚아준다’ 라는 근성이 필요하다. 요즘은 그런 근성을 지독히도 무장한 소위 ‘꼴통’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가장 부럽다. ‘꼴통’ 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목표로 하는 일에 전력 매진할 줄 알고, 준비된 실력 또한 뒷받침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앞으로 나의 목표는 바로 ‘꼴통 윤혜경 기자’ 소리 듣기다.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