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여왕 5월이 지나갔다. 올해로 동국인이 된지도 어언 40년이다. 인생이 한바탕 꿈과 같다더니 풋풋한 얼굴을 쳐들고 치기만 가득한 채 동악을 오르내리던 스무 살 청년이 이제 환갑이 될 만큼 시계바늘이 뺑뺑이를 돌았다. 대학생이 되었다는 우쭐함이었을까 아니면 진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때문일까. 아무튼 우리는 그놈의 괴물 같은 유신 덕분에 비싼(그 때도 대학 등록금은 비쌌다) 등록금을 내고도 휴강이 태반인 학창시절을 리포트로 대체하며 보내야 했다. 학교에 나와 친구들을 만나고 교문을 사이에 두고 총무원 비탈길에서, 제일병원 앞길에서 전경과 최루탄 공방을 벌이던 때는 그나마 교내에 머물 수 있어 좋았다.

더 많은 날들을 충무로 일대의 다방을 전전하며 과 친구들과 모여 애꿎은 담배만 없앴다. 그러다가 한 번씩 학교가 궁금해 교문 근처에 접근이라도 해 볼라치면 영락없이 ‘당분간 휴교함’이라는 굵은 붓글씨를 부적처럼 붙이고 닫혀 있는 철문과 마주해야 했다.
그렇게 두 해를 보내고 난 입대했다. 그 당시 흔하던 강제 징집이 아니라 내 발로 훈련소로 향했다. 늘 시위대의 뒤꽁무니에서 구경만 하다가 줄행랑을 놓던 내가 강제징집을 당할 일은 당연히 없었다. 한 여름 조치원의 예비사단 신병교육대에서 소금을 퍼 먹어 가며 훈련을 받던 어느 날 몇 자 편지로 간단히 입대 인사를 전했던 선생님으로부터 답장이 당도했다.

고대하던 연서는 아니었으나 학교 로고가 선명한 편지지와 붓으로 써 내려간 선생님의 글씨를 대하는 순간 평소에는 어려워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던 후회가 밀려왔다. 사실 선생님은 여러 교수님들 중에서도 까다롭기로 소문나 학생들 간에도 호불호가 뚜렷한 분이셨다.
입학식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신입생을 모두 연구실로 불러 모아 문교부 제정 교육용 한자 1,800자를 100번씩 써서 여름 방학 전까지 제출하라는 과제를 줄 만큼 학생을 사랑하던 분이기도 했다. 당시는 전공 학점을 안 주겠다는 엄포에 못 이겨 마지못해 원고지를 채워 제출했으나 훗날 그 덕에 나는 평생을 어문 선생으로 교단에서 어린 학생들 앞에서 똥폼을 잡을 수 있었다.

매년 5월이 오고 동국축전으로 캠퍼스가 들뜰 즈음이면 선생님을 한 번 찾아뵈어야지 하는 마음만 갖고 살았다. 아마도 스승의 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오랜 세월 동안 기실 선생님을 뵌 것은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아, 선생님!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의 부음을 들었다. 누가 묘비에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더니 꼭 그 꼴이었다. 세브란스 병원의 빈소에서 영정 속의 선생님을 뵙고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거동이 불편해 한동안 자리보전을 하신다는 소식에도, 한 동네 사는 동문 고형(高兄)의 함께 찾아뵙자는 제의에도 그저 건성으로 답하며 바쁘다는 핑계를 내세우고 차일피일 하던 터였다.
다음 달이면 선생님이 떠나신 지도 두해가 된다. 선생님은 그 곳에서 평생을 공부하신 두보(杜甫)를 만나셨을까? 아니면 여기 계실 때처럼 여전히 그의 시만 읽고 계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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