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혹한에 불씨를 던지는 자각이 필요하다”

▲달라이라마

인간은 자각(自覺)의 존재이다. 자각이란 자신이 다른 것과 무엇이 같고 다른지를 확신하는 내면의 각성이다. 자각을 통해 인간은 스스로 성스러워지며 원하는 길을 걷게 된다. 정신이 깨어나는 자각의 순간을 거쳐 인간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종교의 영역에서 자각은 본질의 문을 여는 열쇠이다. 싯다르타 태자는 번민하는 평범한 인간에서 자각의 문턱을 넘어 깨달은 이, 즉 붓다(Buddha, 佛陀)가 되었다. 인간이 마침내 하늘이다(人乃天)는 각성을 통해 동학(東學)은 인간이 사뭇 하늘처럼 귀하다는 구원의 가르침을 험한 세상을 향해 던졌다. 고대 유태교는 정신적 자각의 순간인 알레프(Aleph)를 지나 궁극의 섭리에 도달한다고 가르쳤다. 알레프란 모든 것의 시작이며,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원천이다.

종교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자각의 의미는 깊고 중하다. 자각 없는 학생은 무엇 때문에 배우는지 알지 못하고, 자각 없는 선생에게 수업이란 생계의 방편에 불과하다. 시민이 주권을 자각하면 민주주의가 완성되며, 정치인의 자각은 인간이 타인을 사랑하는 가장 적극적 방법으로 정치를 실현한다.
수십 년 전 두 명의 상반된 인물로부터 개인적 각성과 자각에 대해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한 명은 작가이고, 한 사람은 폭력배였다.

작가는 후배작가에게 이렇게 말했다. “작가란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첫 문장을 쓸 때부터 작가로서 써나간다” 작가가 되려하지 말고 작가로서 글을 쓰라는 당부이다. 서툰 한 줄의 문장일지언정 자신의 글에 책임을 지고, 자각하며, 스스로의 삶과 글을 완성해가라는 바람이다. 작가가 꿈이라면 무엇보다 원고지를 앞에 두고 “나는 작가이다”고 외쳐보자. 

폭력배는 이렇게 말했다. “깡패가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 깡패로 살겠다고 마음먹는 순간부터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폭력배로 태어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살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폭력은 자신의 언어가 되며 삶의 수단이 되어버린다. 결국 나약한 존재가 되어 폭력의 먹잇감이 된 채 거리의 어둠 속에 몸을 숨긴다.

일상적이고 하잘 것 없어 보이는 일에도 자각의 힘이란 크고도 크다. 남대문시장 좌판에 옷을 놓고 파는 상인은 그의 일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장사란 좋은 물건을 싼 값에 파는 일이다.” 나쁜 물건이라도 비싸게 팔아 이익을 남기는 것이 장사의 원칙이라 믿는 이들은 한낱 장사치에 불과하다. 그들은 자신의 일에서 어떤 성취도 보람도 없이 결과만을 위해 살아가게 된다. 자기가 누군지를 알고 자신의 일이 어떠하며, 세상에 무엇을 돌려줄 수 있는지 알아야 하루하루 주머니 속에 담긴 것에 사로잡히지 않는 법이다.

공교육의 폐해 중 하나가 획일적인 가치관의 주입에 있다. 개개인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있고 어떤 가능성과 보석이 숨어있는지를 고려치 않고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같은 길을 걷는 평등한 시민으로 만들어 버린다. 등수를 나누고 서열을 매기며 오직 목적만을 섬기게 한다. 배움의 과정도 필요 없고 오직 취업이란 결과를 얻을 수 있으면 성공한 학창시절로 여기고 있다.

자각이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가치를 알아채는 데 있다. 자신이 남과 다르고, 그 다른 점이 스스로의 삶을 결정짓는다는 사실에 눈을 떠야 일상적 가치관에 발목 잡힌 인생이 되지 않을 것이다.
취업철이 되고 방학 때가 되면 늘 보는 일이 있다. 성형외과가 붐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얼굴을 고치려 줄을 선다. 성형이 붐을 이루어 이미 사회적 현상이 되어버렸다. 사회적 경고를 떠나 조롱거리가 될 만큼 심각해졌다.

외모를 중시하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라 강변하지만 실상은 자신의 얼굴과 자신의 인생이 싫은 것이다. 안면기형으로 사회생활에 심각한 장애를 겪는 이들도 있다.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 성형은 돈과 의술의 힘을 빌려 잠시 혐오스런 자신을 떠나보려는 애처로운 노력이다. 눈을 고친 이는 코를 고치고 싶어지고, 턱을 깎고 싶어지며 결국 다른 이의 얼굴을 원한다. 언제부턴가 비슷비슷한 생김새가 거리를 채우고 있다. 성형 뿐 만 아니라, 언론과 정계, 기업과 관료에 이르기까지 이런 자기부정과 자기파멸의 모습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개인의 욕망 하나하나가 번져 이제는 사회적 욕구가 되어버렸다. 부처님은 욕망은 결코 충족되지 못하니, 욕망의 본질에 눈을 뜨라고 가르쳤다. 스스로를 아껴 사랑하기에 모습조차 바꾸려 한다지만, 그것이 변화는 아니다. 포장을 바꿔 속에 것을 속이려는 눈속임이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가식적인 방편에 불과하다. 변화란 자각의 부산물이고, 자각은 자기가 누구인지 눈을 뜨는 일이기 때문이다.

종교적 존경을 받는 달라이라마는 자신도 종종 인간적인 번민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고 고백했다. 그럴 때마다 큰소리로 “나는 달라이라마이다.”라고 외친다고 했다. 얽매인 마음의 굴레가 사라질 때까지 몇 번이고 외친다고 했다. 그리하여 자신을 자각하고 자기 삶을 확신하고 욕망과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다.
대승불교에서 이상적 인간형으로 삼는 보살(菩薩, Bodhisattva)은 자각(覺, Bodhi)한 생명(有情, Sattva)이다. 즉 생명의 본질을 자각하고, 우리 안에 진리가 있음을 깨닫고, 남과 내가 다르지 않음을 알아, 타인의 행복이 나의 행복에 닿는다는 것을 알아차린 이들이다. 그리하여 중생(衆生, Sattva)이 자각하면 보살이라고 가르친다. 깨어난 중생은 욕망의 노예가 되지도 않고 세상을 꿰뚫는 지혜를 갖게 되며 모두가 자신과 다를 바 없다는 연민의 마음을 갖게 된다.

자각은 자신의 내면에 분명한 기준을 갖는 일이다. 중심이 흔들리면 우리는 늘 번민하고 갈등하며 변질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자각이 없다면 자신을 남과 착각하게 되고, 남의 가치에 자기를 맡기게 되며, 세상의 겉모습에 사로잡혀 살게 된다. 몽환 속에 살아가는 몽유병자가 따로 없다.
겨울이다. 모든 것이 얼어붙는다. 혹 세파에 마음 또한 추위에 갇혀 버렸다면, 자신의 마음속에서 열정과 지혜를 일깨우도록 애써보자. 세상의 혹한에 불씨를 던지는 자각이 있기를 바란다. 나의 별을 쫓아 나의 길을 걸어가자.

 

다큐멘터리 PD,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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