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세계인 혜초스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⑧ 카스(카슈가르), 파키스탄

중국의 동쪽 서안에서 시작된 여정은 실크로드의 서쪽 끝 카스(카슈가르)로 이어졌다. 카스는 중국 전체의 99%의 위그르족이 거주하는 곳이다. 현재 이곳은 민족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이슬람을 믿는 위그르족이 중국 내에서 독립을 원하기 때문이다. 2011년 7월 31일 카스에서 발생한 테러도 이슬람 무장 세력의 소행으로 밝혀졌다.
중국내에서 여러 차례 발생한 위그르족 유혈 사태를 비롯해 오사마 빈라덴의 9.11테러 이후 무슬림(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에 대한 시선은 곱지 않다. 필자 역시 그들과의 만남은 왠지 무서웠다.

어디든 사람 사는 모습은 비슷
7월 13일 카스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조용한 동네였다. 여자들은 대부분 화려한 두건을, 남자들은 햇볕에 그을린 검은 피부에 청록색 모자를 쓰고 있었다. 또한 오른쪽 눈썹과 왼쪽 눈썹이 붙어있는 사람들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두 눈썹이 붙어있는 것은 ‘결혼을 일찍한다’는 것을 뜻한다. 눈썹과 눈썹 사이에 털을 나게 하는 약도 있다고 하니, 미의 기준도 한국과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카스 중심에 위치한 바자르(전통시장)는 한국의 재래시장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빵과 양고기가 좌판에 놓여 있고, 전통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도 곳곳에 눈에 띄었다. 누런 이를 드러내며 붉은 복숭아를 옷에 쓱쓱 닦아 건네주던 아저씨의 미소도 잊히지 않는다. 세계 어디든 최고의 호객행위는 무료 시식인 것 같다. 먹고 배탈이 나지는 않을까 잠시 망설였지만, 건네받은 복숭아를 한 입 베어 물고는 그 달콤함에 금세 웃고 말았다.
시장을 둘러보며 무슬림에 대한 오해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서로 다른 종교와 생김새를 가지고 있어도,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은 어디든 비슷하다. 그런데 실상을 보지 못하고 편견에 휩싸이니 모든 것이 두려웠다. 어두운 마음을 열고 나니 카슈가르의 바람에서 꽃향기가 나는 듯했다.
승려 혜초도 나와 같은 것을 구법 여정 길에서 배웠으리라. 마음을 열고 새로운 사람들을 마주할 때에만 그 실상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을.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가 왕오천축국전에 각 지역의 종교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생김새, 음식, 역사, 정치, 생활상까지 구체적으로 기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카라코람 하이웨이, 중국·파키스탄 연결
중국 국경을 넘어 파키스탄으로 가기 위해서는 카라코람 하이웨이를 지나야 한다. 카라코람 하이웨이는 해발 4,693미터에 이르는 쿤자랍 패스를 가로질러 중국과 파키스탄을 연결하는 도로이다. 취재단은 4일간 버스를 타고 카라코람 하이웨이를 달렸다.
도로 주변에는 7,000미터가 넘는 설산들이 쭉 둘러 있다. 구름에 가려진 하얀 설산 끝, 마치 부끄러워 자기를 보이지 않으려 하는 것 같았다. 깨지고 부서진 흔적 그대로가 남겨져 있는 산, 그것은 그 자체로 빛났다.
무심코 ‘우리의 인생도 이 산과 마찬가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려운 고비가 쌓여 지금의 내가 만들어졌으니, 난 넘어지고 쓰러져도 그 자체로 빛날 것이다. 인생의 슬픔과 고난도 결국 받아들여야 할 내 자신의 일부이다.
혜초도 중국과 파키스탄의 국경을 넘으면서 힘들 때마다 자연에서 위안을 얻고 인생의 답을 배우지 않았을까. 40도가 넘는 무더운 날씨는 고산증 증세를 더 악화시켰다. 그러나 이것도 설산을 지나며 그렇게 무뎌져 갔다.

두려워말고 원하는 길을 찾아 떠나라
도종환 시인의 ‘처음 가는 길’이라는 시의 구절에 이런 말이 나온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은 없다. (중략) 누구도 앞서 가지 않은 길은 없다. 오랫동안 가지 않은 길이 있을 뿐이다. 두려워 마라 두려워하였지만. 많은 이들이 결국 이 길을 갔다. 죽음에 이르는 길조차도 자기 전 생애를 끌고 넘은 이들이 있다.’
지금 우리가 걷는 실크로드 길도 혜초뿐만 아니라 누군가가 먼저 걸었고 지났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길도 마찬가지다. 현재 눈앞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내가 향하는 이 길은 과거에 누군가가 이미 걸었을 것이다. 그러니 겁먹을 것이 없다. 두려울 것이 없다. 원하는 목표를 향해 걸어라, 너 혼자만 가는 길이 아니다. 승려 혜초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슬림에 대한 오해는 스스로 만들어
7월 18일 카라코람 하이웨이를 건너 파기스탄 길기트에 도착했다. 왕오천축국전에 혜초스님은 길기트에 대해 “카시미르국에서 서북쪽으로 산을 넘어 7일을 가면 소발율국(지금의 길기트)에 이른다. (중략) 가난한자가 많고 부자는 적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기록이 지금도 유효한 듯 시내 주변에는 허름한 집들과 맨발의 아이들이 많았다.
또한 무장 군인들이 도로를 순찰하고 있었다. 길기트는 중국과 인도 사이의 영토분쟁이 끊이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카르가마애불로 향하던 취재단도 삼엄한 경비의 대상이었다. 무장 군인들은 취재단이 타고 있던 지프차를 계속 뒤따라 왔다. 분쟁지역의 긴장감이 느껴졌다.
길기트 시내에서 30분을 차로 달려 카르가마애불에 도착했다. 7세기 토번 점령시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애불이 선명하게 보였다. 마애불 주변에는 젊음 무슬림들이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부처님의 은은한 미소 아래 누워 있는 무슬림들. 이 만남은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취재단은 정각원장님의 지도에 따라 반야심경 독송과 108배 기도를 했다. 타국에서 만난 부처님께 예의를 갖춘 것이다. 푸른 풀밭 위, 뜨거운 태양 아래. 우리의 양말과 티셔츠는 점차 젖어갔다. 근처에 있던 이슬람 청년들은 우리의 행동을 바라보고 있었다.
간호사로 일하는 Sharafat Hussain씨는 이 모습을 보고 “카르가마애불 앞에서 108배하는 모습을 처음 봤다. 신기하다”고 말했다. 마애불이 어떻게 무슬림들에 의해 훼손되지 않고 보존되고 있냐고 물었더니, 그는 오히려 나에게 왜 무슬림이 마애불을 훼손해야 하냐고 반문했다. “나는 모든 종교를 존중한다” 그의 대답은 참 간결했다.
타인에 대한 오해는 자기 스스로 만든다. 필자는 실상은 보지 못한 채, 무슬림을 파렴치한 파괴자인 것처럼 대했다. 우리는 타인을 얼마나 분별하고 오해하며 살고 있는가. 스스로 생각의 덫을 만들고, 그곳에 빠진다. 스스로 적을 만들고 있다. 사람을 적이 아닌 벗으로 삼았던 승려 혜초. 그가 이 모습을 본다면 허탈한 웃음만 지을 것 같다.

박지현 기자 bungaeo0@dongguk.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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