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術的(학술적) 價値(가치)커, 패기 찬 부처모습- 誕生佛(탄생불)

  예술이 한 민족의 마음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라면 宗敎藝術(종교예술)은 그 종교의 理想(이상)을 직설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非具形的(비구형적)인 종교의 心像(심상)을 具形的(구형적)으로 나타냈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래된 廢寺院(폐사원)의 무너진 돌담 틈에서 부서진 기왓장을 보거나 아니면 길가에 제멋대로 뒹굴고 있는 半身像(반신상)의 佛像(불상)을 대하거나 우리들은 그 보잘 것 없어 보이는 遺物(유물)조각들에서 佛敎(불교)의 무한한 眞理(진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佛敎美術(불교미술)을 좋아하고 이해하려는 것은 물론 그것이 藝術的(예술적)인 感情(감정)때문인 점도 있겠지만 그 궁극적인 目的(목적)은 바로 그 진리의 소리를 듣고자 하는데 있다. 佛敎(불교)가 새롭고 발랄할 때는 불교미술도 따라서 숭고하고 아름다워 진리의 소리가 스스로 우러나오지만 불교가 늙고 침체하였을 때는 흉하고 타락한 태작들이 나와 진리의 소리는 숨을 죽이고 만다. 흔히 절에 가면 불당 벽에 걸려있는 그림들을 볼 수 있다. 그 그림들의 대부분은 經文(경문)들을 묘사하고 있는 變相圖(변상도)들이다. 글자를 모르는 무식한 대중들에게 經(경)의 뜻을 전해주자면 그림들이 제격이다. 현대식으로 표현하자면 視聽覺敎育(시청각교육)이다. 화엄경이나 법화경의 도리를 말로써 그리고 글로써 아무리 잘 설명할지라도 그들에겐 馬耳東風(마이동풍)격이 될 수밖에 없다. 佛像(불상)도 마찬가지다. 부처님의 위대성을 아무리 글자나 말로 외쳐보았댔자 중생들이 얼른 납득될리 만무하다. 이보다는 부처님의 자비롭고 평화스럽고 숭고스런 모습을 그림으로 또는 조각으로 잘 묘사한다면 대중들은 저도 모르게 환희작약, 부처님을 공경하고 드디어 자신도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고자 노력할 것은 뻔 한 이치다. 이것은 바로 불교적 진리의 소리임에는 틀림없고 또한 불교의 아름다움(美術(미술))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불교가 생긴 이래 세계도처에서 특히 인도ㆍ중국ㆍ우리나라에서 수천년 동안 많은 정력과 비용을 마다하고 이러한 불교미술들을 제작하는 대사업을 수행했던 그 뜻은 바로 여기에 있었으며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들이 불교하면 곧 이를 美術品(미술품)들을 연상하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미술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우리 학교는 바로 이들 불교미술품들만 모아둔 우리나라 유일한 佛敎博物館(불교박물관)을 갖고 있다. 국립박물관 다음으로 學術的(학술적)으로 값진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다. 이들 소장품들을 조각ㆍ회화ㆍ건축ㆍ공예ㆍ금석물들로 나누어 중요한 작품 몇 점씩만 추려 지상에 소개하고자 한다.

  ◎金銅誕生佛(금동탄생불)(佛敎彫刻1)
  誕生佛(탄생불)이라는 것은 부처님이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걸으면서 왼손은 하늘을, 바른 손은 땅을 가리키면서 자기가 전 우주에서 가장 존귀하다(天上天下(천상천하) 唯我獨尊(유아독존))고 외쳤다는 說話(설화)를 구상화(具像化)한 것이다. 그래서 딴말로 천지불(天地佛)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이 誕生佛(탄생불)은 삼국시대의 가장 우수한 작품 중의 하나이다. 얼굴은 童顔(동안)이면서도 패기가 만만하여 탄생불의 ‘이미지’가 잘 나타나고 있다. 옷은 下衣(하의)정도밖에 입지 않고 있는데 밋밋한 가슴과 볼록한 배는 어린이의 모습 그대로이다. 하늘과 땅을 가리키는 팔은 아주 길어 오른팔은 무릎까지 내려와 부처님의 32상(相)의 독특한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다. 특히 붉은 鍍金(도금)과 暗線(암선)의 녹이 적당히 소화되어 고색이 창연하면서도 고상한 佛格(불격)을 우리에게 실감나게 해준다. 한마디로 말해서 어리면서도 패기 찬 부처님의 모습을 조각적으로 훌륭히 형상화한 우리의 옛 걸작품 중의 하나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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