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東林博士(이동림박사)의 ‘東國正韻硏究(동국정운연구)’

  본교 文理大(문리대) 國文學科(국문학과) 李東林(이동림)교수의 博士學位論文(박사학위논문) ‘東國正韻硏究(동국정운연구)’가 ‘東國正韻(동국정운)’ 完帙本(완질본)의 발견과 同比較(동비교) 연구를 계기로 學界(학계)의 脚光(각광)을 받고 있다.
  國語學界(국어학계)의 重鎭(중진)인 李東林博士(이동림박사)는 ‘東國正韻(동국정운)’ 1권과 6권밖에 없었을 때 수년간에 걸쳐 同(동) 2ㆍ3ㆍ4ㆍ5권을 復原(복원), 再構(재구)하였는데, 이번 原本(원본)과의 대조로서 그 놀라운 正確性(정확성)과 硏究成果(연구성과)가 立證(입증)된 것이다.
  ‘韓國固有文化硏究所(한국고유문화연구소)’(建大(건대)부설)에서는 지난10일, 71년末(말) 江原道(강원도) 江陵(강릉)에서 발견, 國寶(국보) 제1백43호로 지정된 ‘東國正韻(동국정운)’ 完帙本(완질본) 6권原本(원본)을 學界(학계)에 처음 공개하는 한편 ‘東國正韻硏究(동국정운연구)에 대한 問題點(문제점)’을 주제로 한 成元慶(성원경)교수 建大(건대)의 학술발표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成(성)교수는 본교 李東林(이동림)(文理大國文學科(문리대국문학과)) 敎授(교수)의 ‘東國正韻(동국정운)연구’를 거의 ‘완벽’에 가까운 再構篇(재구편)이라고 높이 評價(평가)하여 學界(학계)의 관심을 모은 것이다.
  明(명)의 ‘洪武正韻(홍무정운)’에 對(대)해 우리나라의 漢字音(한자음)을 바로 잡기위해 세종29년 9月(월)에 완성된 ‘東國正韻(동국정운)’은 1940년대에 安東古家(안동고가)에서 제1, 제6권(국보71호)만이 발견됐을 뿐 完帙本(완질본)을 알 수 없어 많은 학자들이 복원을 위하여 연구를 거듭했었다.

  그동안 이에 대한 연구는 46년 洪起文(홍기문)의 ‘正韻發達史(정운발달사)’ 58년 李崇寧(이숭녕)의 ‘東國正韻解題(동국정운해제)’ㆍ金喆憲(김철헌)의 ‘東國正韻初聲攷(동국정운초성고)’ㆍ‘東國正韻韻母攷(동국정운운모고)’, 南廣祐(남광우)의 ‘東國正韻式(동국정운식) 漢字音硏究(한자음연구)’ 兪昌均(유창균)의 ‘東國正韻硏究(동국정운연구)’ 同(동) ‘復原篇(복원편)’(66년) 李東林(이동림)의 ‘동국정운연구’, 兪昌均(유창균)교수 ‘復原(복원)에 따른 비판’ 同(동) ‘再構篇(재구편)’등이 있고 외국에서는 日本(일본) 河野文郞(하야문랑)의 ‘동국정운再考(재고)’ 그리고 成元慶(성원경)의 ‘15세기 韓國字音與中國聲韻之關係(한국자음여중국성운지관계)’, ‘동국정운내용考(고)’와 ‘東國正韻(동국정운)과 洪武正韻譯訓音之比較(홍무정운역훈음지비교)연구’등이 있다. 이 가운데 특히 注目(주목)되어온 것은 李東林(이동림)ㆍ兪昌均(유창균)교수의 復原(복원)ㆍ再構(재구)연구였는데, 이를 비교 비판한 成(성)교수는 “李東林(이동림)교수의 再構篇(재구편)은 거의 완벽에 가깝다”고 전제하고 “李(이)교수는 광범한 韓(한)ㆍ中韻書(중운서)를 통해 聲韻母系統(성운모계통)을 찾아 ‘古今韻會擧要(고금운회거요)’로부터 聲韻母(성운모)의 색출작업으로 字母(자모)책정 및 韻圖(운도)작성에 성공했고 ‘東國正韻(동국정운) 23字母(자모) 通考(통고)’등은 동국정운재구의 거의 原本(원본)에 가까운 정확을 얻게 했다”고 말했다. 반면 成(성)교수는 李(이)교수의 復原(복원)이 전체 1만5천字(자) 가운데 初頭字(초두자) 35개가 다른 것이거나 오판되었다고 지적했는데 이에 대해 李東林博士(이동림박사)는 “世宗(세종)당시 제작한 동국정운과 본인이 만든 것과의 차이는 예의검토돼야 할 문제”라고 밝히고 成(성)교수가 지적한 35개소 初頭字(초두자)가운데 ‘동국정운 原本(원본)자체가 틀린’ 16개소를 지적하였다.
  그간 李(이)연구는 서울大(대)대학원에서 東國正韻(동국정운) 1권과 6권의 影印本(영인본)이 발간(58년2월) 되는 등 學界(학계)의 끊임없는 연구대상이 되어왔다.
  그러나 그 成果(성과)는 동국정운 全帙(전질)이 발견됨과 同時(동시)에 그 對照(대조)연구로서 본교 李東林(이동림)박사의 학문적 업적이 높이 評價(평가)된 것이다. 本校(본교) 國語(국어) 國文學(국문학)의 개가가 아닐 수 없다.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