敎養學部(교양학부)를 마치고

  大學(대학)은 人生(인생)을 微分(미분)하는 방법과 積分(적분)하는 방법을 배워 自我(자아)를 찾게 하는 곳이라고 일년 간의 생활을 통해 내 나름대로 정의해 보았다.
  ‘메커니즘’과 ‘휴머니즘’이 共存(공존)하는 모순된 시대 상황에서 우리 젊은 세대가 최대공약수적 고민과 최소공배수적 理想(이상)을 쫓아 공통적인 문제를 안고 모인 곳이 대학이 아닐까? 그것은 단순 구조에서 복합 구조로 변해가는 現代(현대)의 時代的(시대적)인 필연적 귀착점이 바로 大學(대학)이라는 말일 것이다.
  난 大學(대학)에 들어오기 전 대학을 말할 때면 늘 ‘사랑과 자유’로 나의 기대를 압축시켰다. 멋있는 사랑은 젊은 핏 속에 生命(생명)을, 무한한 자유는 고동치는 심장에 可能性(가능성)을 부어주리 라고.

  大學(대학)에 들어와 난 그것이 幻想(환상)임을 알았다. 몸 전체로 부딪쳐도 꿈쩍도 않는 엄청난 現實(현실)의 壁(벽)― 그것은 責任(책임)의 壁(벽)이었다. 얼마동안 나는 壁(벽) 앞에서 멍청하게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니코틴과 알코올과 카페인과 강렬한 음악과 두툼한 전문 서적과 교수의 도수 높은 안경의 번쩍임이 뇌리 속에서 소용돌이 치고 나의 영혼은 그 속을 허우적대다 지쳐 몽롱한 혼미 속으로 빠져들었다. 선배들이 마련해준 환영회석상에서, 팔딱거림을 느끼며 들어선 미팅 장소에서, 바람 부는 날이면 곧잘 찾아들던 바로크 감상실에서… 어디를 보든 도처에 흩어진 영혼의 조각들을 목격해야 했다. 계엄령의 무게 앞에서 나의 무게를 가늠하다 살짝 야간열차에 몸을 실어버리고 말았던 추억은 나에게서 現實(현실)과 責任(책임)의 무게를 실감하게 한다.
  역사학을 해보겠다는 날더러 방랑과에 들어갔다며 늘리던 절친한 친구 S가 어느 날 휴학을 하고 낙향해 버렸을 때 나는 또 다른 壁(벽)을 意識(의식)했다. 그건 ‘에피투미아’와 ‘아가페’의 철책을 두르고 人間(인간)을 포로로 하려는 거대한 壁(벽)이었다. 현실의 벽을 넘으면 책임의 벽이, 또 그 벽을 넘으면 自身(자신)의 벽이 가로 놓은 것을 인식하게 된 것이 내 고작 일년간의 수확이었다.
  공통적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벽을 이제야 겨우 절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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