音樂性(음악성)은 復合的(복합적) 조직 要素(요소)

  詩(시)는 그 始原(시원)을 舞踊(무용)에 두고 있음은 이미 주지의 事實(사실)이다. 樂器(악기)가 出現(출현)하기 이전의 原始(원시) 種族(종족)들은 춤과 더불어 歌唱(가창)을 하였지만 그것은 分明(분명)한 歌詞(가사)를 지닌 게 아니고 그저 不調和(부조화)한 부르짖음에 불과했다. 이것은 ‘메캔지’의 著書(저서), ‘文學(문학)의 革命(혁명)’에서 잘 敍述(서술)되고 있다.
  <舞踊(무용)에 맞추어서 말없는 노래가 나온다. 즉 混決(혼결)한 人間(인간)의 부르짖음, 不調和(부조화)의 音聲(음성)으로 된 것이다. 이 단계의 舞踊(무용)과 노래에는 調和(조화)가 없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아직 음절이란 것이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分明(분명)한 가사도 없이 시작된 原始藝術(원시예술)은 차츰 一定(일정)한 가사로 바뀌는 意識性(의식성)의 過程(과정)으로 옮기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참된 의미를 지니는 實現形式(실현형식)을 就(취)하게 되며 비로소 예술이라는 生命(생명)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原始藝術(원시예술)에서 派生(파생)된 文學(문학)은 점차 ‘장르’別(별)의 發展(발전)을 가져왔고, 그 중에서도 詩文學(시문학)은 그 性格上(성격상) 음률이라는 有機的(유기적)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모든 文學(문학)의 형식이 言語(언어)인 것처럼 詩(시)도 言語(언어)라는 形式(형식)을 빌어 表現(표현)됨은 물론이다. 그러나 유독 詩(시)의 言語(언어)를 獨特(독특)한 言語(언어)라고 말하는 것은 다 같은 言語藝術(언어예술)이라 하더라도, 小說(소설)이라든지 수필의 言語(언어)와는 구별되는 特色(특색)이 있기 때문이다. 시의 言語(언어)는 바로 그 生命的本質(생명적본질)이 特異(특이)한 感性的作用(감성적작용)을 通(통)해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즉 詩(시)의 言語(언어)는 전술한 바와도 같이 무용의 리듬=음악의 리듬=詩(시)의 리듬이라는 特殊(특수)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에즈라파운드’는 ‘讀書術(독서술)’에서 시의 종류를 세 가지로 분류하여 ‘음악시’ ‘시각시’ ‘논리시’로 나누고 있다.
  이 중에서 ‘音樂詩(음악시)’는 즉 소리로서의 言語(언어) 効果(효과)를 얻는 쪽에 비중을 두며, 言語(언어) 意味(의미) 및 言語(언어)가 傳達(전달)하는 ‘이미저리’와 不可分(불가분)의 것으로 이것은 소리가 意味(의미)의 方向(방향)이나 傾向(경향)을 定(정)하는 것인 만큼 詩(시)의 음악적인 性質(성질)을 결정한다.
  言語(언어)의 意味(의미)와 음악성과 ‘이미저리’는 個別的(개별적)으로 獨立(독립)하여 詩(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有機的(유기적)인 관련 아래 統一的(통일적)으로 作用(작용)함으로써 詩(시)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詩(시)에 있어서 言語(언어)의 음악성이라는 것은 곧 韻文(운문)의 規律(규율)인 ‘리듬’이 問題(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 ‘리듬’에 관해서 ‘메켄지’는 구체적으로 說明(설명)하기 위하여 그것을 규정하는 데는 客觀的(객관적)인 方法(방법)과 主觀的(주관적)인 方法(방법)의 두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먼저 客觀的(객관적)으로 보면 ‘리듬’이란 규칙적인 抑揚(억양)과 박자를 가진 時間(시간)의 運動(운동)이며 큰 觀的(관적)으로 보면 그것은 ‘時間(시간)의 知覺(지각)’이다.
  이로써 ‘리듬’은 一定(일정)한 强度(강도)의 變化(변화)를 同伴(동반)하는 규칙적인 간격에서 생겨나는 感覺(감각)의 연속을 가리킨다. 그러면 이러한 ‘리듬’ 詩(시)에서 얻어지는 效果(효과)는 무엇이겠는가? 리듬은 다만 규칙적으로 反復(반복)하는 刺戟(자극)의 客觀的(객관적)인 强度(강도)를 변경시킬 뿐만 아니라, 그 刺戟(자극)의 길이와 간격과 性質(성질)을 변경시킬 때에도 생기는 것이다. 換言(환언)하면 자극의 强度(강도)는 차치한다 하더라도 자극의 길이와 간격과 성질의 세 가지 중 어느 하나가 더 追加(추가)가 되면 이것을 관찰하는 사람은 그것으로써 강한 波動(파동)이 일어나는 幻覺(환각)을 느끼게 되며, 그로 말미암아 같은 强度(강도)의 자극도 ‘리드미컬’하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詩(시)의 韻律(운율)은 그 民族(민족)이 가지는 言語(언어)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우리나라를 살펴보면 우리의 古代文學(고대문학)에서 主(주)로 使用(사용)되었던 三四調(삼사조), 四四調(사사조)등이 韻文文學(운문문학)의 한 形態(형태)이다. 그러나 이러한 定型(정형)은 비단 歌辭(가사)나 時調(시조)만이 아닌 小說(소설)에서도 적용되고 있음은 興味(흥미)로운 사실이다. 이에 대해 金長好敎授(김장호교수)는 “우리나라에서는 詩歌自體(시가자체)가 너무 오랫동안 音樂(음악)과 附同(부동)하고 있었다. 따라서 散文(산문)에도 그 四四調(사사조)등의 韻律(운율)이 남아있다.”라고 說明(설명)하고 있으며 “갑자기 自由詩(자유시)가 獨立(독립)하였기 때문에 우리의 現代詩(현대시)에는 엄격한 의미의 metre가 없다.”고 덧붙이고 있다.
  대체로 弱强三韻脚(약강삼운각)으로 씌였던 古代(고대) 그리스에 시작한 詩(시)의 押韻法(압운법)은 셰익스피어 時代(시대)에 와서 無韻詩(무운시)등으로 시험되기도 했으나 역시 ‘미터’는 그대로 사용되어 왔었다. 그러나 近來(근래)에 와서 운문은 散文(산문)의 勢力(세력)에 눌리어 다소 沈滯(침체)된 듯하지만 ‘TㆍS엘리오트’에 의해 운문의 效用(효용)은 크게 主唱(주창)되었고, 近者(근자)에 이르러 國內(국내)에서도 詩劇(시극)이 자주 上演(상연)되어 成果(성과)를 거두고 있다.
  詩(시)(운문)에 있어서의 音樂性(음악성)은 複合的(복합적) 組織要素(조직요소)로써 視覺的効果(시각적효과)를 노리는 散文的構成(산문적구성)의 詩(시)보다도 우리의 內面(내면) 心理(심리)에 있어 더욱 정서적이고 暗示(암시)를 풍겨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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