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대학 문학의 거목(巨木) 시인 서정주의 집 ‘봉산산방’

지난 4일, 서울특별시 관악구 남현동 1071-11번지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국내 유일의 미당의 창작 산실(産室)이라 불리는 미당 서정주의 봉산산방이 개관(開館)했기 때문이다.

그의 친일 이력은 끊임없이 논란의 대상으로 남았지만 그의 한국 시 문학의 큰 줄기를 이끌어온 대시인으로서의 업적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70여년에 이르는 긴 창작기간, 관악 아래 자리 잡은 봉산산방의 빛바랜 사진 속에는 그의 문학에 대한 열정과 혼이 고스란히 인화되어 진한 국화꽃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미당의 체취와 향기 그윽한 봉산산방

이곳 봉산산방에서 ‘질마재 신화’, ‘떠돌이의 시’, ‘팔할이 바람’, ‘산시’등 주옥같은 시집들이 연이어 탄생했다. 곰이 쑥과 마늘을 먹고 웅녀가 됐다는 단군신화에서 따온 ‘봉산산방’이란 이름은 미당이 살아생전 직접 지었다고 한다.

그의 성품을 반증하듯 집은 소박하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이 여기저기서 묻어났다. 20평 남짓한 건물은 2층으로 이뤄진 건물.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미당이 직접 그린 집의 평면도가 반긴다. 그 옆 나무 벽에서는 살아생전 미당의 사진들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진다. 식당에는 미당이 즐겨 마시던 맥주가 놓여 있고 그의 서재에는 유품들이 가득했다.

병마와 싸우던 아내 극진히 보살핀 애처가 미당


내 늙은 아내는 아침 저녁으로 내 담배 재떨이를 부시어다 주는데,
내가 “야 이건 양귀비 얼굴보다 곱네, 양귀비 얼굴에는 분때라도 묻었을 텐데?”
하면 꼭 대여섯 살 먹은 계집아이처럼 좋아라고 소리쳐 웃는다.
그래 나는 천국이나 극락에 가더라도 그녀와 함께 가 볼 생각이다.
- 서정주 ‘내 늙은 아내’

“선생님은 참 끔찍이도 아내를 사랑하셨지, 병마와 싸우는 부인 속옷도 직접 빨았어”

햇살 가득한 미당의 정원에서 만난 그녀는 고개를 들어 아래위로 미당의 집을 훑었다. 마치 옛날을 회상하는듯 해 보였다. 미당 살아생전 이웃사촌이었다는 하유생씨는 “서정주 선생님이 직접 시를 써서 준 도자기를 아직까지 보관한다”며 그를 추억했다.

그녀의 말처럼 미당 서정주의 집은 아내와의 추억으로 가득했다. 유독 봉산산방 사진 속의 미당은 아내와 함께일 때 더욱 활짝 웃고 있었다. 치매에 걸린 미당의 부인과 아내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했던 미당 서정주. 부인 방옥숙 여사가 작고하자 그의 시처럼 미당은 곡기를 끊고 맥주로 연명했다.

결국 아내가 작고한 두 달 보름 뒤인 눈 내리던 하얀 날, 미당은 보고픈 그녀의 곁으로 갔다.

그의 시만큼이나 예술적 감성은 빛나고


그리하여 이 관악산 밑의 내 집 봉산산방에서 내가
새로 시작한 일은
호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여러 가지 꽃나무들과 여러 모양의 바윗돌들을 모아
이것들의 모양과 빛깔들을 늘 대조해 보며
조끔치라도 더 나은 조화를 이루게
배치해 보고 또 고쳐 배치해 보고 하는 일이었네
- 서정주 ‘관악산 봉산산방’

취재를 하다가 무심결에 잔디를 밟자 한 노인께서 불같이 화를 냈다. ‘이 잔디를 알고나 밝느냐’는 그의 호통은 뼈대 있고 일리 있는 호통이었다.

살아생전 미당은 8만원도 채 안 되는 교수 월급을 아껴 백 그루에 달하는 나무와 열 트럭의 바윗돌들을 70평의 마당에 심고 배치했다고 한다. 시를 짓는 미학적인 감성이 집에도 작용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봉산산방에서 그의 미학적 감성은 전혀 느낄 수 없다. 그가 생전에 주로 심던 감나무와 후박나무는 사라졌고 미당의 취향과는 거리가 먼 수백만 원짜리 나무들이 정원에 가득했다. 무언가 모를 이질감마저 들었다.

미당 사후 10년, 봉산산방이 겪은 우여곡절

하지만 이마저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했다. 대지 304.2㎡(92평)·건평 154.71㎡(47평), 지하 1층·지상 2층의 양옥 건물로 1969년 6월 준공을 마친 봉산산방은 많은 우여곡절 끝에 탄생했다.

미당은 자신의 집을 아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줬지만 무관심 속에 방치됐다. 살아생전 유물들은 뿔뿔이 흩어져 고창의 ‘미당시문학관’과 우리대학 도서관으로 옮겨졌고 집은 빈 채로 방치됐다. 심지어 한 건축업자에게 팔려 빌라로 지어질 위기에 내몰렸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우리대학 윤재웅 교수가 신문을 통해 이러한 사정을 기고하기에 이르렀다. 다행히도 당시 현진건과 최남선의 고택(故宅)이 헐려 비난을 받던 전 서울시장 이명박 대통령이 교부금(交付金) 7억 5000을 내줘 간신히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설계를 시도한 시공사의 설계안은 다시 봉산산방을 위협했다. 관악구가 맡긴 설계사의 설계안 속에는 원형보존이라는 본 목적은 온데간데없고 현대식의 봉산산방이 떡 하니 있었다. 윤 교수는 다시 조선일보에 기사를 제보했고 결국 디자인심의위원회는 이 설계안을 다행히 받아들이지 않게 됐다.

또 지금의 봉산산방은 우리대학 도서관에서 소장하던 유품들도 한 몫 했다. 막상 집이 재건되자 유물이 필요했지만 ‘미당시문학관’에서는 쉽사리 유물들을 내어주지 않았기 때문. 윤 교수에 의해 우리대학에 보관중인 유품 60점이 원래의 집으로 돌아오게 됐다.

개관을 맞아 만감이 교차한다는 윤 교수는 “비록 어렵게 개관을 마쳤지만 지금부터 시작이야. 앞으로 미당의 집에서 격조 높은 문화행사가 수시로 열려 한국문학의 저력을 드러내는 가늠자 역할을 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복원 첫 발 내딛은 봉산산방

감나무야 감나무야 잘 있었느냐 감나무야.
내가 없는 동안에도 언제나 우리 집 뜰을 지켜
늘 싱싱하고 청청키만 한 내 감나무야…….(중략)

- 서정주 ‘1994년 7월 바이칼 호수를 다녀와서
우리집 감나무에게 드리는 인사’

“세월이 선생님을 뺏어가 야속해, 이제나마 복원되어 다행이지. 마치 따뜻한 온기가 선생님의 품에 안긴 듯 하구려 허허허. 이제 자주 와야지”

살아생전 직접 한번 보지 못해 아쉽다는 관악구 문인협회 회원들은 이제 봉산산방에서 세미나도 자주 가질 예정이라고 한다. 11년간 무관심 속에서 미당은 얼마나 외로웠을까. 온전치 않지만 그를 기억하는 작업이 미약하게나마 첫 발을 내딛었다.

취재를 마치고 나오는 길, 문 밖에는 앙상한 가지의 한 그루의 소나무가 외롭고 고독히 봉산산방을 지키고 서 있었다.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