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인사대천명’ 신조로 방송경영 외길 걸어

“시크릿 가든 현빈의 대사를 끊임없이 스스로 자문해 보시길 바랍니다. 자기가 정말 무엇을 원하는지 치열하게 고민하세요. 할 수 있는 만큼 많은 것을 경험하세요. 목표가 세워지면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강구하고 자신의 모든 열정을 다하세요.  

성공과 실패는 간발의 차이입니다. 나머지는 하늘에 뜻에 맡겨야 하죠. 스스로가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하는 사람만이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저의 좌우명이기도 합니다”

KBS 청주방송총국 총국장 신창섭(경영79졸)동문을 만나고 왔다. 신창섭 동문은 “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라는 드라마 명대사 한 마디로 명료하게 후배들을 위한 조언과 격려를 전했다.

1985년에 KBS 방송요원으로 입사하여 현 2010년 충청북도 KBS방송을 총괄하는 총국장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신창섭 동문은 스스로가 자랑스럽고 떳떳할 수 있도록 치열하게 노력해왔다. 공영방송 지역총국장이 된 지금도 그의 꿈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외교관’에서 세계화 꿈꾸는 CEO로

“원래 꿈은 독신외교관이었습니다. 전 세계의 여인들을 만날 수 있는... (웃음). 어린 마음에 ‘코리아 게이트’의 박동선 씨가 너무 멋져보였죠. 그는 우리나라의 로비스트로 미국 사회에서 활약했었던 사람이죠. 한국인으로서 미국 주류사회의 사교계를 주름잡던 사람이니 어린 마음에 부러웠던 거죠. 막연하게나마 어렸던 나에게 전 세계를 누비는 것이 꿈이 되어 버린 거죠”

신창섭 동문은 군사독재가 최고조에 달했던 70년대말 대학시절을 보냈다. 당시 대학은 외교관으로서의 꿈을 펼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대학은 시국사건이 있을 때마다 휴강이 잇따랐다. 암울하고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는 학생들을 공부보다 학생운동으로 내몰았다.

그는 제대로 된 학업을 이어가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TIME반 동아리를 만들어 외무고시를 조금씩 준비하며 청운의 꿈을 꿨다. 79년 우리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공군장교로 군 복무를 마친다. 그리고 연세대 행정대학원에 입학하여 행정학을 공부하며 자신의 꿈을 키워나갔다.

대학원을 졸업할 때 까지만 해도 그의 꿈은 외교관이었다. 청춘의 모든 열정을 받쳐 외교관이 되고자 했지만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그에게 새로운 길이 나타났다. 88올림픽의 주관방송사였던 한국방송공사(KBS)가 대대적인 방송요원 공채에 나선 것이었다.

신창섭 동문은 전 세계를 향해 한국을 알리는 공영방송 KBS에서 자신의 못다한 꿈의 가능성을 찾았다. 한국의 사회와 문화를 전 세계와 교류하는 공영방송의 미래를 꿈꾸며, 외교관의 꿈을 이어갔다.

최선을 다했던 자만이 흘릴 수 있는 눈물

그는 1985년 입사와 동시에 KBS 기획조정실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그리고 IMF 위기로 어수선하던 1998년에는 국제협력실 차장이 됐다. 전 세계와 방송을 통해 소통하는 ‘소프트 외교관’의 꿈에 한 발짝 다가갈 수 있었다. 차장으로 승진하기까지의 과정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공사였던 KBS는 승진때마다 시험을 쳤다. 공교롭게 시험을 준비하던 그에게 시련이 찾아왔다. 공부를 해도 모자랄 판에 2개월동안이나 병실에 입원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수 많은 주사바늘로 손조차 자유롭게 쓰지도 못할 상황이었다. 신창섭 동문은 당시를 회고하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신 동문은 “그때 정말 피가 끓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느낄 수 있었다. 꿈을 잃지 않고 싶었다. 몸은 아팠지만 꼭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다.”고 당시의 심정을 말했다. 그는 병실에 누워 링거 주사가 꽂힌 손으로 공부를 계속했다. 시험예상문제를 작성하여 2개월 동안 병실에서 문제와 싸웠다.

승진시험을 준비하면서, 그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좌우명을 가슴에 깊숙이 새기었다.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는 없었다. 결과는 하늘에 맡길 뿐이었다.

KBS의 승진시험은 공정했다. 일반 직원에서 차장급으로 승진한 신창섭 동문은 1996년 강릉방송국 총무부장으로 부임했다. 다행히 강릉에서 건강도 회복했다. 그리고 1998년 국제협력실 차장에 임명받았다.

막 한류드라마가 아시아에서 각광을 받기 시작한 때였다. 그는 국제협력실에 근무하는 4년동안 KBS가 한류 붐을 일으키고 이를 국가브랜드로 활용할 수 있게 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포기했던 외교관으로서의 꿈은 KBS라는 방송국을 통해 조금씩 이뤄지고 있었다.

그 이후 그는 유럽방송연맹에서 KBS 홍보대사를 역임했다. 그리고 각종 국제협력교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글로벌 감각을 겸비한 방송경영인으로서의 경력을 하나씩 쌓을 수 있었다. 

한국의 BBC를 꿈꾸며

현재 신창섭 동문은 KBS 수신료 인상을 국민적 합의와 공감대를 형성하여 관철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중이다. KBS 수신료 인상은 공영방송의 역할을 강화하고 확대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KBS는 지금 보다 더 많은 사회적 책무를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수신료가 조금 더 필요한 것이죠”라고 신 동문은 말했다. KBS는 공영방송으로서 EBS 송출과 난시청 지역 해소를 위한 사업을 벌이고 있다. 일본이 지진피해를 겪으면서 재난방송에 대한 중요성도 부각 되는 시점이다.

KBS가 전 세계 공영방송의 롤모델인 BBC처럼 성장해야할 시기라는 것이다. 그는 그러기 위해 방송인을 육성하고, 방송경영에 대한 연구를 담당할 사단법인 형태의 미디어경영연구소 설립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회사 정년 이후에도 방송경영인으로서 한국 미디어 환경의 발전을 위한 꿈을 계속 이어가고자 한다.

한 발짝 물러서서 다시 한번 나아가자

인터뷰를 끝마치며 치열한 삶 속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비결을 물었다. “열심히 노력 했는데도 실패할 수 있다. 그래도 꿈을 잃지 말아야 한다. 한 발짝 물러설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다시한번 나아가면 꿈은 언젠가 이루어진다” 끝끝내 꿈을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던 그의 삶은 꿈꾸고 도전하는 청춘들을 지금 위로하고 있다.

 

 

<프로필>

△ 1956년 12월 26일 출생 △ 1979년 동국대 경영학과 졸업 △ 연세대 행정대학원 졸업 △ 1985년 한국방송 입사 △ 1996년 KBS 강릉방송국 총무부장 △ 2002년 KBS 정책기획센터 부주간 △ 2004년 KBS 경영본부 재원관리팀 경기남부사업소장 △ 2007년 KBS 안전자원센터 후생안전팀장 △ 2009년 KBS 경영본부 총무국장  △ 2010년 KBS 청주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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