停滯性理論(정체성이론)은 重大誤謬(중대오류)

  東洋史學(동양사학)은 그 대상이 지역적으로는 漢文化圈(한문화권), 印度文化圈(인도문화권), 이슬람文化圈(문화권) 등으로 大別(대별)할 수 있고 시간적으로도 인류문화의 4大(대)발상에서 격변하는 昨今(작금)에 이르기까지 엄청나게 광범하다. 대상이 이렇게 광범한데 비하여 우리나라의 東洋史學界(동양사학계)는 연구인이 극소수인데다가 관심도 또한 우리와의 관계의 密接度(밀접도)에 치우쳐 漢文化圈(한문화권) 특히 中國史(중국사)에 국한된 형편을 면치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筆者(필자)의 연구도 中國史(중국사)의 특정한 時期(시기)와 분야에 한정되어 있는 터이므로 學界(학계)의 연구동향을 綜括(종괄)하여 그 초점을 부각시킨다는 것은 능력 밖의 일이다. 여기서는 다만 筆者(필자) 나름의 所見(소견)의 일단을 피력하는데 그치려한다.
  近代(근대) 아시아는 西勢東漸(서세동점) 즉 산업혁명으로 무장한 西歐列强(서구열강)의  帝國主義的(제국주의적) 침략에 의하여 식민지, 반식민지화 함으로서 그 主體的(주체적) 역사발전이 저해당하는 수난의 길을 걸어야만 하였으며, 특히 2次大戰(차대전)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강대국의 간섭이나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더하여 戰爭(전쟁)은 아시아지역의 專賣特許(전매특허)인양 頻發(빈발)하고 있다. 極惡(극악)의 전쟁이 아시아의 전매품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 물음에 대하여 아시아의 대부분은 後進國(후진국)이다. 後進國(후진국)에서는 여러 모순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그 矛盾(모순)의 尖銳化(첨예화)가 전쟁을 유발한다고 하면 그만일런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학에서는 그렇다면 아시아의 諸民族國家(제민족국가)가 어째서 후진국이 되었는가 하는 의문을 갖고 그 역사를 분석, 검토하는 연구를 진행하여 각 역사를 추진해온 要因(요인)내지는 法則性(법칙성)을 구명해 내어야 하는 것이다.

  東洋(동양)의 역사를 보는 東洋史學者(동양사학자)의 태도에는 두 相異(상이)한 입각점을 지닌다. 東洋(동양)의 歷史(역사), 社會(사회)가 停滯的(정체적)이라는 경우와 그 반대로   主體的(주체적) 발전을 겪어왔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前者(전자)의 입장은 대체로 西歐(서구)의 東洋學者(동양학자)들로서 列强(열강)의 對(대)아시아 제국주의적 침략을 合理化(합리화)시키고 정상화시키려는데 (意圖的(의도적)이거나 非(비)의도적이거나 간에) 있는데 대하여 후자는 대체로 東洋人(동양인)자신의 생존권과 외부 침략의 부당성을 闡明(천명), 비판하는 입장을 취한다. 이 두 相異(상이)한 주장에 대하여 객관적 정당성은 물론, 後者(후자)의 편이다.
  前者(전자)의 입장을 대표하는 學者(학자)로 유명한 ‘막스ㆍ웨버’를 들 수 있는데 그의 社會學的(사회학적) 업적은 위대한 공적으로 평가되고 있으나 그의 아시아사회의 停滯性理論(정체성이론)은 중대한 오류를 범하였다. 그는 西歐(서구) 근대사회를 설명함에 있어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를 資本主義(자본주의)의 정신으로 보아 그것을 社會成立(사회성립)의 결정적 要因(요인)이라 규정하는 한편 新敎(신교)이외의 一切(일체)의 宗敎(종교)는 非(비)근대적인 것으로 못 박았다.  다시 말하면 新宗敎(신종교)만이 資本主義的(자본주의적) 近代精神(근대정신)을 가졌기 때문에 西歐(서구)에 근대사회가 설립할 수 있었는데 반해서 東洋(동양)의 종교 즉 유교, 불교, 힌두교, 도교 등은 그러한 合理的(합리적) 市民(시민)정신을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停滯(정체)의 역사를 면할 수 없었다하여 東西(동서)의 宗敎(종교)를 통하여 아시아의 停滯性(정체성)을 입증하려 한 것이다.

  이러한 理論(이론)의 論理的(논리적)귀결은 停滯(정체)한 東洋社會(동양사회)에 進步的(진보적) 西歐(서구)의 資本主義(자본주의)를 이식시켜 주었다는 西歐優位(서구우위), 東洋劣等論(동양열등론)이 된다. ‘웨버’ 이외에도 위로 ‘몽테스큐’, ‘아담ㆍ스미스’에서 ‘헤-겔’, ‘위트포-겔’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으로 이 입장에 선다. (그렇다고 하여 볼테르 등의 中國社會禮讚論者(중국사회예찬론자)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여하튼 이 停滯性理論(정체성이론)은 역시<停滯(정체)의 아시아>의 一員(일원)인 日本(일본)이 明治維新(명치유신)을 통해 資本主義(자본주의)로 武裝(무장)하자 自己(자기)만은 西歐(서구)의 역사가 걸었던 정상적 發展段階(발전단계)를 걸었다고 주장하면서 中國大陸(중국대륙)과 韓半島(한반도)는 아시아諸國(제국)과 마찬가지로 停滯性(정체성)을 主體的(주체적)으로 극복할 수 없기 때문에 자기네의 植民地(식민지)가 되어야 한다는 이른바 皇國史觀(황국사관)을 政略的(정략적)으로 확립하여 帝國主義侵略(제국주의침략)을 合理化(합리화)시키는  理論的(이론적) 근거를 삼았던 것이다. 國史學界(국사학계)에서나 日本(일본)의 일부 양심적 學者(학자)들에 의하여 皇國史觀(황국사관)의 虛構性(허구성)이 폭로되고 있거니와 그 母體(모체)라 할 아시아사회의 停滯性理論(정체성이론)의 神話(신화) 또한 그 발판을 잃어 간다. 그것은 學界(학계)의 줄기찬 노력의 결실이기도 하려니와 역사현상이 직접 雄辯(웅변)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도 大部分(대부분)의 아시아의 民族國家(민족국가)가 고난의 歷程(역정)을 걷고 있지만 <병든 獅子(사자)> 中國大陸(중국대륙)과 섬나라 日本(일본)이 苦難(고난)을 극복하고 强大國(강대국)의 대열에 몫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社會(사회)가 停滯性(정체성)을 本質(본질)로 하였던 것이 아니라 그들 민족의 주체적 노력과 그들 社會自體(사회자체)의 內在的(내재적) 발전의 所産(소산)인 까닭에 ‘後進的(후진적)’ 아시아諸民族(제민족)의 受難(수난)도 그렇게 극복되어 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준 실증인 것이다.

  ‘學問(학문)이 現實(현실)을 따라가지 못 한다’는 유행어가 급변하는 아시아의 정세와 그 역사를 연구하는 東洋史學界(동양사학계)의 급급한 情況(정황)을 표현해주는 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과학에 있어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대화’에서 발전의 法則性(법칙성)을 발견해내어야 하기 때문에 매우 과학적이고 신중한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테면 停滯性理論(정체성이론)을 否定(부정)하려는 작업도 그렇다. 그것을 부정하는 일은 곧 아시아의 역사가 世界史的(세계사적) 보편성의 발전과정을 걸어온 것임과 동시에 그 자체의 특수구체적 社會體質(사회체질)이 어떠한 작용을 해 왔는가하는 문제를 해명하는 작업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中國史(중국사)에 국한시켜 보더라도 資本主義萌芽期(자본주의맹아기)를 明末(명말)ㆍ淸初(청초)에 설정하려는 社會(사회) 經濟的(경제적) 論點(논점)도 자본주의가 西歐(서구)에서 移植(이식)되어 진 것이 아니라 內在的(내재적) 발전에 따라 봉건사회가 해체되어 감을 증명하려는 노력의 一端(일단)인 것이며 思想史分野(사상사분야)에서도 ‘웨버’ 의 獨善的西歐優位論(독선적서구우위론)이 파탄의 위기에 처에 있다. 즉 西歐(서구)에서 급진적 宗敎改革(종교개혁)이 이루어 졌다면 홀로 東洋(동양)의 宗敎(종교)에서 조용한 變革(변혁)이 없으란 법은 없다. 孔(공)ㆍ孟(맹)의 原始儒敎(원시유교)가 朱子學(주자학) 陽明學(양명학)을 거쳐서 明末(명말)ㆍ淸初(청초)의 三大(삼대)사상가 黃宗義(황종의) 顧炎武(고염무) 王夫之(왕부지)에 이르러서는 놀라운 變革(변혁)을 겪게 되었다. 특히 룻―쏘에 앞서기 약 50년, 동양의 룻―쏘라 불리는 明夷待訪錄(명이대방록)의 著者(저자) 黃宗義(황종의)에 관한 연구도 필시 이러한 문제의식에 焦點(초점)이 두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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