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徒護國團(학도호국단)의 産室(산실)…東國大生(동국대생) 主軸(주축) 3백여 명 수류탄 들고 戰線(전선)으로-

  “6ㆍ25가 터지자 우리는 學徒護國團(학도호국단)을 중심으로 즉각 학교에 집결했지요. 오직 國防(국방)을 위한 젊은 熱意(열의) 하나뿐으로…” 6ㆍ25당시 본교 학도호국단團長職(단장직)을 맡고 있었던 崔桂明(최계명)(52ㆍ史學卒(사학졸) 事業(사업))同門(동문)의 의지에 찬 一聲(일성)이다.
  건장한 체구의 崔同門(최동문)은 19일 6ㆍ25의 戰況(전황)을 설명하면서 당시 學徒護國團(학도호국단)의 産室(산실) 또한 우리母校(모교)였다고 강조한다.

  軍政(군정)당시 좌우익이 심하게 對立(대립), 각 大學(대학)에서는 이것이 根源(근원)이 되어 ‘以北學聯(이북학연)’ ‘全國學聯(전국학연)’등 學生團體(학생단체)가 속출, 테러행위가 난무하는 實情(실정)이어서 학생사회의 질서 확립이 절실히 요청되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大韓民國政府(대한민국정부)수립 후 學徒護國團令(학도호국단령)이 발표되었는데, 학도호국단 이외에는 모든 학생단체를 해산시키기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대다수 대학은 이에 반발했으나 다만 本校(본교)등만이 祖國(조국)의 現實(현실)을 직시, 細部施行(세부시행)요강을 확정하는 등 學徒護國團(학도호국단)창단의 선봉이 되었다. 이 무렵 崔同門(최동문)과 朴義鉉(박의현) 당시 體育科敎授(체육과교수)가 他校(타교)를 방문하면서 學徒護國團(학도호국단) 설치를 위해 순회강연을 하기도 했단다. “그제야 비로소 타교에서도 인식을 새롭게 하더군”하며 崔同門(최동문)은 당시의 상황을 회상했다. 6ㆍ25가 발발하자 本校生(본교생)들이 학도호국단을 중심으로 救國隊列(구국대열)에 앞장섰던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 “당시 6월 27일에는 학교부근처까지 파편이 날아들었지요. 학생들은 긴급히 集結(집결)하여 金東華學長(김동화학장)님 등을 방공호에 대피시키고, 學籍簿(학적부)도 재빨리 방공호에 묻는 등 大學自衛(대학자위)태세를 갖추었습니다.” 戰勢(전세)가 급격히 惡化(악화)되어 학생들은 共産軍(공산군)의 軍歌(군가)를 뒷전으로 들으면서 學校(학교)뒷산(南山(남산))을 넘었다. 서빙고 근처에서 國軍(국군)과 함께 한강을 건너 참담한 후퇴를 시작했다. 이 때 같이 渡江(도강)한 학생은 20명. “우리는 渡江(도강)한 사실을 얼마나 비겁하게 여겼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 굴욕을 극복하고자 非常學徒隊(비상학도대)를 수원에서 結成(결성)했지요.” 崔(최)동문은 그 쓰라린 惡夢(악몽)을 기억하기가 괴로운 듯 눈길을 떨궜다. 非常學徒隊(비상학도대)는 본교생을 중심으로 한 우익학생 3백여 명이 모인 救國學生團體(구국학생단체). 여기서도 崔同門(최동문)이 初代隊長(초대대장)으로 피선되었다. 7월 초경 國防部(국방부) 정훈국(당시局長(국장)은 李瑄根(이선근) 本校總長(본교총장))에 연락, 수류탄을 지급받고 永登浦(영등포)로 北上(북상), 첫 임무를 부여받았다. 學徒隊(학도대)의 임무는 현역군인을 설득, 사기를 높이도록 하라는 것. 영등포 일대의 격전지를 순방하면서 연설을 했다. 희생된 隊員(대원)은 하나도 없었다. “오직 정의감 하나로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당시 상황이 아직도 역력한 듯 崔(최)동문은 힘주어 말한다.

  그러나 연일 박격포 세례를 받아 軍人(군인)들 中(중) 부상자가 속출, 現地(현지) 도착 후 사흘 뒤엔 후퇴명령이 내렸다. 大田(대전)으로 다시 후퇴. 大田(대전)에서는 김석원 장군이 이끄는 特別師團(특별사단)의 創設(창설)에 흡수되어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다. 서울 奪還(탈환)을 목적으로 1百(백)20名(명)이 再北上(재북상), 이로써 本格的(본격적)인 전투에 처음으로 가담했다. “불 끈 야간열차에서 비로소 校服(교복)과 군복을 갈아입었는데, 이때는 참으로 감회가 깊었습니다.” 戰鬪(전투)현지에서 총기를 지급받았다. 총은 3.8式(식)이나 9.9式(식)이고 탄약은 M1소총. 이는 당시의 軍裝備(군장비)상황을 잘 입증하는 것이다.
  “學徒隊員(학도대원)들은 척후병으로 參戰(참전)하여 거의 희생되었습니다. 살아남은 人員(인원)은 40여명. 결국 또 후퇴를 시작했습니다.” 特別師團(특별사단)은 大邱(대구)에서 해산. 다시 本校生(본교생)만 부산시 신창동 大覺寺(대각사)에 집결하여 ‘國家民族(국가민족)을 위해 젊은이답게 죽을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 끝으로 崔(최)동문은 “여러분의 선배들이 얼마나 뜨거운 祖國愛(조국애)로 뭉쳤었던가를 상기하라”고 당부하며 “國家觀(국가관) 정립이 아쉽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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