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와 둔황’전

 

편집자주
천축을 넘어 페르시아와 아랍에 이르기까지, 실크로드를 내딛는 발걸음 속에 기록된 유물들이 생생한 얼굴로 우리나라에 상륙했다. 오는 4월 3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실크로드와 둔황’ 특별전이 그것이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특히 727년 신라의 혜초스님이 험난한 서역(西域)의 사막길을 걸으며 기록했던 '왕오천축국전'이 1283년 만에 프랑스 국립도서관으로부터 임대되어 일반에 첫 선을 보인다. 프랑스에서 조차 미공개됐던 귀중한 <왕오천축국전>.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동서 문명 교류의 대동맥 실크로드를 걸었던 혜초스님의 지난했던 구도여정을 돌이켜보는 이번 전시회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月夜瞻鄕路     달밝은 밤에 고향길 바라보니
浮雲颯颯歸    뜬 구름 너울너울 돌아가네.
緘書參去便    그 편에 감히 편지 한 장 부쳐보지만
風急不聽廻    바람에 거세어 화답이 들리지 않는구나.
我國天岸北    내 나라는 하늘 끝 북쪽에 있는데
他邦地角西    남의 나라 땅 끝 서쪽에 있네.
日南無有雁    일남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
誰爲向林飛    누가 소식 전하러 계림으로 날아가리.

위의 글은 혜초스님이 타국에서 적은 오언시의 전문이다.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는 것은 설레는 일이지만 오언시에서 사무치는 외로움과 그리움을 느낄 수 있듯 당시 시대여건을 고려한다면 서역 5개국을 맨발로 돌아다닌다는 것은 분명히 대단한 여정이다.

약 2만 km에 달하는 4년의 이동거리. 교통이 발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떠나지 못하는 우리들과는 달리 혜초스님은 길 위에서 수많은 경탄과 깨달음을 만났다.

사각사각 나는 연필소리, 기자가 눈을 돌려 그 곳을 보니 한 스님이 조용히 연필로 무엇인가를 적고 있었다. 스님은 한 구석에서 왕오천축국전을 필사하고 계셨다. “온갖 고행을 이겨내며 탐험한 그의 위대한 정신을 조금이나마 느껴보고 싶습니다” 라며 눈시울을 붉히는 스님은 왕오천축국전을 친견한 것만으로도 영광이라고 말했다.

1300년 만에 찬란한 빛을 발하게 된 왕오천축국전, 스무 살 혜초가 맨발로 거닌 실크로드에는 과연 어떤 이야기들이 담겨있는 것일까.

험난한 불모지를 걸었던 이들의 흔적

이번 전시는 총 4부로 나뉘어 있다. 1부와 2부에서는 실크로드의 도시, 실크로드의 삶과 문화라는 주제로 전시의 시작을 연다. 서역북도와 서역남도, 천산북로의 오아시스가 소개되며 이에 따른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함께 소개해 타 문화를 이해하는 즐거움을 더한다.

실크로드는 사람들이나 짐승들이 살 수 없는 불모지였다. 하지만 북쪽의 천산산맥과 남쪽의 곤륜산맥에서 흘러나오는 눈과 빙하가 녹은 물로 인해 도시를 만들고 삶을 유지해나갔다.

옛날 유목민들은 주인이 죽으면 주인이 타던 낙타를 순장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순장할 때 낙타들은 무릎을 구부린 채 강제 순장을 시켰는데 그 때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또한 낙타는 당시 사막에서 중요한 교통수단 중에 하나였다.

양이나 소, 말 등의 가축을 방목하며 유목하는 천산산맥 북쪽 초원지대에 살던 유목민들은 농경민들에게 가축을 제공하고 곡식을 제공받았다. 유목민들의 거주지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살펴보면 다양한 동물의 형상이 금속과 나무, 뼈로 조각되었다.

2002년 타클라마칸 사막의 동쪽에서 4천여년이 흐른 무덤이 발견됐다. 바로 누란의 샤오허묘지로 자세히 살펴보면 사막의 한 가운데에 나무로 만든 배 모양의 관이 줄지어 있다. 위구르어로 ‘휴식’을 뜻하는 아스타나 고분 벽화 속에 담긴 부장품도 전시 돼 있다. 죽어서도 내세의 삶이 이어지기를 바라며 무덤 사방 벽면에 자신들의 원하는 삶이 그려져 있다.

불교는 인도에서 시작됐다. 불교미술 역시 인도에서 시작되어 동쪽으로 전파되면서 각 지역의 특성에 맞게 형성되었다. 전시장 한 켠에는 벽화 조각의 파편들이 전시되어 있다.
 
화려하고 웅장한 역사의 보고 둔황

3부부터는 둔황과 왕오천축국전을 통해 혜초스님의 여행을 설명하고 있다. 중국 간쑤성 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서역이 시작되는 관문인 둔황 막고굴의 유물 16점, 복제품 20점이 소개된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눈여겨 볼 점은 둔황 석굴 모형 2점(17호굴, 275호굴)이다. 전시장에는 17호굴과 275호굴 모형을 통째로 가져다 전시해 둔황 막고굴의 화려하고 웅장한 예술세계를 현장에서 느낄 수 있다.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굴. 1900년 발견 당시 석실 안에 3m가 넘는 높이로 수많은 두루마리가 쌓여있었다. 수량은 확인된 것만 4만 점이 넘고 연대가 있는 문서 중 이른 것은 4세기, 늦은 것은 11세기다. 문서의 80% 이상은 한문 문서, 90%는 불교 관련 문헌이다.

 

 

 

 

5,893자에 담긴 구도정신, 왕오천축국전

727년 11월 혜초스님은 당나라 안서도호부가 있는 카라샤르에 도착하게 된다. 인도를 향해 중국을 출발한지 수년이 지난 후다. 바다를 통해 인도를 도착한 혜초는 불교의 8대 성지를 순례한 후 서쪽으로 간다라를 거쳐 파미르 고원을 넘는다. 그가 직접 지나갔거나 들은 것을 기록한 곳은 모두 40여 곳에 달하며 8세기 초 그는 이 모든 기록을 왕오천축국전에 남기게 된다.

혜초스님이 쓴 왕오천축국전은 1900년 둔황에 머물던 중국의 도사 왕원록이 우연히 발견한 막고굴 17호굴 안에서 새로운 석실과 함께 발견됐다. 무려 3m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양의 두루마리는 당시 그곳에 와있던 중앙아시아의 탐험가 오럴 스타인에게 넘겨주게 되고 이를 다시 프랑스의 동양학자인 폴 펠리오가 사들이는데 이 문서더미 속에 왕오천축국전이 끼어있다.

왕오천축국전에서 혜초스님은 오천축국, 즉 인도 구법 여정을 담아 기록한다. 혜초스님은 720년 장안에서 떠나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순례했다. 지금 현존하는 왕오천축국전은 인도 동북부에서 기록이 시작된다. 바이샬리와 석가모니의 열반지 쿠시나가라, 석가모니가 처음 설법한 바라나시를 거쳐 중인도로 가게 된다.

중인도에서 3개월, 그리고 남인도에서 2개월을 거쳐 결국 서인도로 향하는 혜초스님은 탁실라를 지나 카슈미르 지방에 들어선다. 카슈미르에서 불교미술이 전성기를 누린 간다라에 이르게 되고 다시 간다라에서 남파, 페르시아, 아라비아등을 거친다.

다시 토하라에서 와한을 거쳐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파미르에 이른다. 동쪽으로 흐르는 그의 일정은 중국 땅에 들어가 타클라마칸 사막과 천산산맥 사이로 난 서역 북도를 따라 둔황의 바로 앞 고창에서 기록이 끊기게 된다.  

둔황에서 동쪽으로, 그리고 경주까지

둔황에서 동쪽으로 란저우를 거쳐 장안에 이르는 길을 하서주랑(河西走廊)이라 부른다. 하서주랑 북쪽의 닝샤는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지만, 흉노 계통의 유목민 전통이 융합된 문화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는 동쪽으로 이어져 신라의 경주까지 이르게 된다.

마지막 전시실에서는 신라 경주의 고분 속에서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온 서역 문물의 자취를 밟아가는 것으로 구성 돼 있다.  문명의 발달로 인해 실크로드의 옛 길들은 폐쇄되고 있다. 점점 사라져가는 길들, 그러나 혜초스님이 직접 발로 누비며 쓴 인고의 고통을 겪어낸 기록들은 우리에게 실크로드의 대역사의 조각들을 모을 수 있게 해 주었다.

박물관을 조금이라도 다녀본 사람들이라면 전시 속의 유물들이 우리나라의 유물들과 다르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비슷하단 사실을 곧 깨닫게 된다. 마치 이전에 어디서 본 것 같은 마냥 친숙한 느낌마저 든다. 바로 이것이 문화가 절대 혼자 동떨어져 발전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그대는 티베트가 멀다고 한탄하나 나는 동쪽으로 가는 길이 멀어 탄식하노라” 평생 울어본 일이 없다는 혜초는 이 시에서 하염없이 울었노라고 밝히고 있다. 지금 구도자 혜초스님은 떠나고 없다. 하지만 그의 육성이 담긴 진리를 찾아 떠난 뜨거운 열정은 여전히 이곳에 존재한다. 

이제 개강이 다가온다. 스펙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잠시 접어두자. 1300년전 미지의 세계를 오롯이 열정으로 극복하며 구도의 길을 걸었던 혜초를 따라 실크로드를 걸으며 진정한 나와 대면해 보는 것은 어떨까. 분명 비단길 속에는 스펙보다 더 반짝이는 답이 숨겨져 있다.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