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는 역사적 정의(定意)이자 정의(正義)”

편집자주
그의 소설은 역사인 것만도, 정의인 것만도 아닌 오로지 소설, 그것도 전례 없이 탁월한 문학 그 자체다. 그것은 한반도와 한민족을 이루는 모든 개별적인 것들 하나하나와 혼연일체가 되면서 동시에 역사적 정의라는 거대한 추상을 우러러 지향한다.

  

제가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처음으로 읽었던 것은 지금으로부터 16-7년 전,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였습니다. 저자의 이름이 저와 비슷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고, 책을 읽고 있으면 적어도 부모님으로부터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피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저 최대한 많은 시간 몰입해서 읽을 수 있다는 대수롭지 않은 이유로 대하소설을 주로 찾아 읽고 있었던 것뿐이었습니다.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게임 등이 지금처럼 활성화되어 있던 시절이 아니었으므로, 연애에 특별한 재능이 없었던 저 같은 학생으로서는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 것 외에는 딱히 할 일이 없기도 했습니다. (만화책 같은 것으로는 부모님의 잔소리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 시간을 죽이기 위해 읽었던 것이 ‘영웅문’이라든가‘삼국지’ 같은 것, 지금으로 말하면 ‘해리 포터’ 시리즈겠지요. 전권을 모아 서가에 진열해놓는 재미도 쏠쏠했습니다. 그러한 취미의 연장선상에서 우연찮게 눈에 들어온 것이 ‘태백산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만남은 어떤 의미에서는 상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도 조정래와 ‘태백산맥’의 명성은 굉장했었기 때문입니다.‘태백산맥’ 전10권이 꽂혀 있지 않은 서점이나 도서대여점은 없었으며 몇몇 교사들도 지나가는 말로 그 제목을 거론하곤 했습니다. 대하소설만 찾아 읽고 있던 고등학생이 ‘태백산맥’을 그냥 지나칠 리는 없는 시대였던 것입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태백산맥’의 주제의식을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던 제가 감당할 수 있을 리 만무했습니다. 소설이 아니라 역사책이었다면 전부 읽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소설 초반, 주인공 중 한사람인 김범우에게 초점이 맞추어지는 순간, 전권을 거의 쉬지 않고 읽어치웠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태백산맥’의 흡인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어서 덕분에 일주일 동안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교과서를 불신하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저는 그때 ‘태백산맥’을 읽고 대단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지금처럼 근현대사가 정규교과과정으로 채택되어 있지도 않았고, 대학가를 제외하면, 그런 내용을 다루는 책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그때까지 제가 암기해왔던 국사 교과서로부터 뭔가 속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기분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교과서에서는 근현대사 부분이 상당히 간략하게 처리되어 있었고 그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긴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빨치산들, 소위 빨갱이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태백산맥’의 내용을 그 시대의 국정교과서와 관련하여 생각했던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기는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역사의 감추어진 진실을 깨닫게 된 듯한 느낌에 완전히 사로잡혔으며 동시에 이전까지 절대적이라고 믿고 있었던 교과서의 신빙성에 대해 근본적으로 회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정래, 그리고 동국문학의 충격

그렇지만 저는 단지 ‘태백산맥’이 역사의 간지(奸智)에 의해 은폐되어 있었던 진실을 밝히는 저작이며 그것에 의해 일방적으로 감화받았다는 경험에 대해 고해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는 “빨간 약”을 선택하여 아키텍트라는 컴퓨터가 인간을 배터리로 소모하기 위해 사육하는 진짜 세계, 즉 “실재의 사막”에 접어들게 됩니다. 네오가 생활하고 있었던 세계는 아키텍트가 인간 사육을 위해 만들어 낸 매트릭스, 허상-가짜 세계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자각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네오는 단순한 해커에서 투사로 변신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세계에 관한 인식에 있어서 근본적인 전회를 경험한다는 것은 곧 자기를 혁신하는 일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태백산맥’이라는 “빨간 약”을 통해 그러한 종류의 전회와 혁신을 최초로 경험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저는 ‘태백산맥’을 통해 기존에 알고 있었던 세계가 완전히 뒤집히고 그에 따라 진실을 스스로 정립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태를 처음으로 직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실제로도 저는 ‘태백산맥’을 읽은 이후 따라서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다른 근현대사에 관한 책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정래의 다른 소설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교지에 ‘태백산맥’과 미군정기에 대한 글을 스스로 기고했다가 다소 곤란한 입장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때 확실히 태백산맥에 들려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이는 저에게 있어서 자의식적으로 책을 찾아 읽고 글을 쓴다는 경험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어떤 목적의식을 가지고 책을 찾아 읽고 자발적으로 글을 쓴다는 일은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쉬웠던 것은 아니었지만 반복하다보니 즐거워졌고 이 일을 계속하고 싶어져서 자연스럽게 작가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태백산맥’은 한 평범한 고등학생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2년 후 운 좋게도 입시에서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두게 된 이 학생이 주저하지 않고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선택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조정래의 특강이 열렸을 때마다 쫓아다니고 ‘아리랑’과 ‘한강’이 차례로 완간되었을 때 모두 찾아 읽었던 이 학생은 십 수 년 후 문학평론가의 길을 걷게 됩니다. 제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배경에 바로 100여년에 이르는 동국문학의 저력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조정래라는 거목을 피하는 것은 가능한가

우연이겠지만 지금 이글을 쓰는 순간에도 KBS 제1TV에서는 조정래의 인터뷰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모니터 한 편에 띄워놓은 네이버의 메인페이지에는 조정래의 에세이 ‘황홀한 글 감옥’에 관한 캐스트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조정래라는 거목은 지금 이 순간에도 한민족 일반에게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찬반과 호불호는 엇갈릴 수 있겠고 논란의 여지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한반도 그리고 한민족에게 있어서 그의 이름과 문학은 결코 부정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간단히 외면해 버릴 수 없는 대상에 해당합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우연치 않게 도처에서 조우하게 된 그의 이름은 이 사실을 여실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첨언하는 것이 도리어 구구하다고 생각됩니다.

조정래는 하나의 역사적 정의다

다만 다음과 같은 사실만은 강조하고 싶습니다. 조정래는 하나의 역사적 정의입니다. 누구도 이 명제를 쉽게 부정할 수 없습니다. ‘태백산맥’과 ‘아리랑’, ‘한강’으로 이어지는 대하소설 삼부작을 통해 그는 한국 근현대사의 잘 알려진 한 버전을 다시 정의(定意)했습니다. 그리고 1983년 9월부터 시작된 이 대장정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결코 실현된 적이 없었던 지고의 정의(正義)에 대한 열망을 강렬하게 노정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정의를 향한 의지가 단순한 프로파간다로 표현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대부분은 근현대를 살아간 한민족의 전형(典型)으로서의 생생한 육체를 입고 있습니다.

더불어 동시대 한국의 자연과 인정세태는 그의 붓을 빌려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표현을 얻었습니다. 요컨대 그의 소설은 역사인 것만도, 정의인 것만도 아닌 오로지 소설, 그것도 전례 없이 탁월한 문학 그 자체입니다. 그것은 한반도와 한민족을 이루는 모든 개별적인 것들 하나하나와 혼연일체가 되면서 동시에 역사적 정의라는 거대한 추상을 우러러 지향합니다. 이러한 그의 문학이 민족이라는 상상된 범주에 지나치게 경사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비판이 가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에 대해 다원성을 지고의 가치로 내세운 나머지 진리와 정의에 대한 치열한 탐구를 경시하게 된 이 시대의 지배적 풍조에 맞서서 최근 “추상을 향한 열정”, 곧 파나티시즘(fanaticism)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탈리아의 철학자 알베르토 토스카노의 물음을 조정래의 소설이 보다 구체적인 형태로 일정 부분 선취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보고 있습니다. 

  

  

  

 

조정래 연표 (1943~)

▲ 1943년 전남 승주군 선암사 출생 ▲ 1962년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입학 ▲ 1970년 '현대문학' 6월호에 '누명' 추천 ▲ 1981년 현대문학상 수상 ▲ 1983년 대한민국 문학상 수상 ▲ 1989년 '태백산맥' 연재 완료 ▲ 1989년 동국문학상 수상 ▲ 1990년 단재 문학상 수상 ▲ 1995년 7월 '아리랑' 집필 완료 ▲ 1997년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석좌교수 임명 ▲ 2003년 제7회 만해대상 수상 ▲ 2006년 제 11회 현대불교문학상 소설 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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