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 속에서, 나는 학교로 돌아갈 생각을 잊고 있었다.
  그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하루, 이틀, 아니 보름이 지나도록 부둣가가 가까운 이 낡은 엄마의 집에 머무르기를 강요하고 있었다.
  노파의 말로는 지난주(週)이후로 우체부는 아직 한 번도 집 앞 골목을 지나가지 않았다 한다. 키가 큰 우체부의 막강한 그림자가 대문 앞 골목을 지나갈 수 있기를 나는 소원하였다. 아침마다 나는 아래층 별실에 있는 노파를 불러서 철대문에 매어달린 우편함을 확인해 볼 것을 명령하였다. 노파가 실내로 돌아오는 소리를 들을 적마다 나의 가슴은 불안으로 떨리곤 하였다.
  ‘오늘도 편지는 일체 없던 걸-. 대체 사라 너는 무슨 소식을 그토록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게야?’
  노파는 무모한 나의 기대를 서슴없이 힐난하였다.
  그래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집안을 점거하는 저녁노을이 차라리 간절한 핏빛일 수 있기를 나는 기원하였다. 꼼짝 않고 두 눈을 감고 있으면 시퍼렇게 부서지는 파도가 일렁거렸다. 부두에는 지금도 남자들의 격렬한 싸움이 있을 것이다.
  창을 열어둔 채로 엄마와 나는 나란히 앉아 있었다. 엄마는 화집을 뒤적이고 있었다.
  엄마는 언제나 ‘쟈코메티’의 조상(彫像)을 좋아하였다. 이따금 차갑게 잠긴 얼굴로 그의 ‘광장’을 얘기하였다. 미혼(未婚)처럼 꿈이 많은 그 엄마가 내게는 늘 정물(靜物)처럼 생각되었다. 어떤 결연한 침묵같은 것을 생각게 하는 엄마를 나는 곁에서 언제나 탐(耽)하여도 족하리라.
  달빛이 흘러들었다. 골목길에서 부는 바람을 아득히 들으면서 나는 화실의 그를 생각하였다.
  ‘사라! 우리는 제발 누추한 눈물을 흘리지 말자. 내게 필요했던 건 너의 그림자였어. 우울하게 정지된 너의 그림자 속에 나는 깊이 묻혀서 익사해 버리고 싶었다.’
  날이 갈수록 그는 나에게 절망하였다.
  ‘사라! 네게서는 도저히 사람 냄새를 맡을 수 없다. 네가 거추장 맞은 자기(自己)를 강력히 내세우는 이상 우리들 사이에 친화가 있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거야. 사라는 왜 내게 가까이 오지 못할까? 이봐! 네 엄마를 욕하지 말아. 네게는 그럴만한 자격이 없어. 네 엄마는 훌륭한 여자야!’
  그가 나를 떠난 지는 이미 오래됐다.
  나는 고민하였다. 애정의 궁극의 의미가 과연 어디 있는가, 왜 나는 남들처럼 쉽사리 한 사람에게 귀의하지 못하는가를 고민하였다. 한 사람에게 끝없이 침식당하여 그 속에서 피어나는 눈물 같은 쾌감에 열광하는 딴 아이들처럼. 그는 밤낮을 화실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내 그림의 소재(素材) 거개가 부둣가 인부들에게서 발견되곤 하지. 그들의 육감적인 골격이 내게는 단 하나 삶의 표징처럼 생각되거든.’
  그는 굵고 강인한 선(線)을 빌어 남자들의 곡선을 강조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언제나 경쾌하게 만났다. 나는 그에게 내가 자란 부둣가를 얘기하였다. 죽음처럼 장엄하게 바다에 스러지는 저녁노을을 얘기하였다. 하역장의 인부들이 거칠게 취하여서 대낮에 토해놓는 토사물을 불결하게 바라보는 나의 어린 시절을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기억해 냈다.
  그와 만남을 생각하고 나는 괴로워졌다.
  엄마는 여전히 화첩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별실에서 나온 노파가 우리를 걱정하여 주었다.
  ‘밤이 찬데 이렇게 앉아서 무슨 짓들이야? 사라는 처음 보기보다 많이 수척해졌어.’
  구슬 한 알이 마루 위로 굴러 떨어졌다. 엄마가 뒤적이던 화지을 그만 덮어 버렸다. 노파가 당황하여 황급히 별실 쪽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엄마가 그녀를 불러세웠다. 바람이 멎었다. 어둠 속에 우뚝 서버린 노파의 주머니에서 가느다란 푸른빛이 일고 있었다.
  ‘사라! 야광구슬이 있어. 구경하겠니? 할머니, 어디 주머니를 풀어봐요. 사라에겐 좋은 놀이가 될 거야.’
  윤곽이 뚜렷한 엄마의 얼굴을 나는 순간 의심하였다. 엄마는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불빛에 부서지는 두 눈의 끝에 이슬이 맺힌 것을 나는 본 것 같았다. 노파가 주머니를 풀어서 탁자 위에 늘어놓았다. 그것은 한 주먹이 훨씬 넘는 유리구슬이었다. 새파란 남빛, 결이 고운 하얀 빛, 무지개 빛깔을 한 구슬들이 탁자 위에 떨어졌다. 완두콩만한 크기의 작고 앙징스런 쇠구슬도 섞여 있었다.
  ‘이게 다 누구 건지나 알아?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네 어머니가 소중히 모아둔 거지. 서울에서 사라가 내려온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내게 맡겨 버린 게야-.’
  노파는 나직하게 말했다.
  엄마가 소리 없이 구슬을 한데 모아 내 가슴에 안겨 주었다. 차디찬 유리구슬의 매끄러운 촉감을 나는 손아귀에서 느꼈다.
  엄마는 대체 어디에서 이처럼 오색찬란한 아이들의 구슬을 모을 수 있었단 말인가.
  ‘사라! 온종일 구슬을 튀기면서 내가 생각하던 게 무엇인지 알 수 있겠니? 건강한 사내아이를 꼭 하나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사라는 떠나는 엄마를 이해할 수 있겠니- 아마도 엄마는 이 말을 하고 싶었으리라. 나는 그만 울고 말았다. 엄마가 따뜻하게 나의 손을 잡으면서 간곡히 말하였다.
  ‘사라, 널 이해시키겠다는 생각은 없었어. 이번 문제는 처음부터 나의 독단에서 출발했으니까 너는 모든 것을 내게 맡기겠다고 얘기해 버린 것이겠지만…, 엄마는 다만 갑작스러운 주위 변화에 쉽게 적용하지 못하는 사라가 근심이 되는구나.’
  나는 차라리 뜨락의 어둠 속에 홀로 잠겨서 영원히 깰 수 없는 깊은 잠속으로 빠지고 싶었다.
  폭우에 한쪽 벽이 무너져 나간 담장을 수리하느라, 우리는 거의 한 나절을 보내기도 하였다. 뜨락에서 갖게 되는 엄마와의 시간은 황홀한 것이었다. 가지가 부러져 나간 키가 작은 판목들을 엄마는 늘 애석해 하였다. 음울한 그늘 속의 자갈들이 빗물에 실려 일제히 앞뜰로 밀려나곤 하였다.
  며칠 전의 구슬 건(件) 이후로 나는 더욱 할 말을 잃고 있었다. 엄마가 생각하는 새로운 출발이 날이 갈수록 어떤 연민처럼 나를 혹사하고 있었다.
  ‘사라는 상심하고 있구나. 엄마가 떠나는 것은 순간의 의미 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 주기를 바란다. 한번쯤은 자신에의 파괴를 시도하고 싶었다. 내가 그간 지켜오던 그늘을 이탈해 보려는 거였어. 그것이 보다 열렬한 삶의 방식일 수도 있으니까….’
  막연한 비애감 같은 것이 밀어닥쳐서 나는 견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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