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洋(동양)의 民俗(민속)전통 再發見(재발견) 기대

○…藝術院(예술원) 주최 第(제)3回(회) 아시아藝術(예술)심포지움이 지난 9月(월) 25日(일) 수유리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열렸다. 藝術院(예술원) 開院(개원) 第(제)20周年記念(주년기념)을 겸한 이번 심포지움은 文學(문학), 회화, 音樂(음악), 演劇(연극) 등 4개 부문에 걸쳐서 主題發表(주제발표)가 있었다. 演劇分野(연극분야)에서는 美國(미국) ‘찰스․엘슨’敎授(교수)와 本校(본교) 李眞淳(이진순) 교수가 ‘東西(동서)예술의 特徵(특징)’이란 공동제목으로 主題發表(주제발표)를 했다. 다음은 李眞淳(이진순) 교수가 發表(발표)한 論文(논문)의 要旨(요지)이다.
<편집자․註(주)>…○

  演劇(연극)의 기원이 宗敎的(종교적) 祭儀(제의)에서 출발하였다는 공통점은 東西洋(동서양)이 다 비슷하게 지니고 있다.
  허나 西洋(서양)은 希臘劇(희랍극)과 같이 紀元前(기원전) 벌써 종교적 제의에서 독립하여 劇場(극장)예술로써 발전을 보았다는 점이 특징의 하나일 것이다.
  허나 韓國(한국)의 경우는 20세기 초에 와서야 비로소 극장을 갖게 되었다.
  그러므로 한국 연극은 劇場(극장) 以前(이전)의 연극과 극장 이후의 연극, 이 두 角度(각도)에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開化期(개화기) 근대문화를 받아들이는 一環(일환)으로 서양식 건축양식의 圓覺社(원각사) 극장이 1908년 개설되면서 처음으로 新演劇(신연극)이 대중 앞에서 공연되었다.
  여기에 신연극이라 함은 當時(당시) 신문학, 新詩(신시), 신학문 등으로 呼稱(호칭)하게 되는 신문화운동의 一聯(일련)의 名稱(명칭)이 연극에도 적용되어 新字(신자)를 머리에 붙인 新演劇(신연극)이라 불리우게 되지만 20년대初(초)부터 新劇發芽期(신극발아기)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新演劇(신연극)은 한국전통연극의 씨가 개량되어 피어난 새 꽃이 아니라 전통연극과는 하등의 聯關(연관)이 없이 단절된 상태에서 韓國(한국)에 옮겨진 꽃이었다.
  韓國(한국)에는 일찍이 山臺假面劇(산대가면극), 成皇祭假面劇(성황제가면극), 海西假面劇(해서가면극), 野遊五廣大假面劇(야유오광대가면극) 외에 인형극 즉 꼭두각시놀음이 있다.
  이러한 연극은 李朝(이조)에서 성행된 놀이지만 그 전통은 이미 三國時代(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고 高麗(고려)를 거쳐 李朝(이조)에서 그 성격을 뚜렷이 굳혔던 것이다.
  한국사람들은 본디 연극을 좋아하였다. 高麗史(고려사) 世家(세가)와 樂志(악지) 等(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上流層(상류층)에서 庶民層(서민층)에 이르기까지 훌륭한 연극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李朝時代(이조시대)로 들어와 불교정책이 유교정책으로 轉換(전환)됨에 따라 유교의 도덕적 閉鎖性(폐쇄성)으로 인하여 연극이 극도로 학대를 받아 극장예술로써 발전할 기회를 놓쳐버리지 않았는가 하는 推定(추정)도 할 수 있다.
  그리하여 庶民層(서민층)에 의해 脈(맥)줄이 이어져왔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韓國(한국) 전통연극은 동양연극이 일반적으로 약속과 양식의 지배를 받는 여러 東洋圈(동양권) 傳統演劇(전통연극)과 공통점이 있다.
  비록 屋內劇場(옥내극장)이 아닌 野外假設劇場(야외가설극장)이나 무대는 소박하고 상징적이고 演者(연자)(俳優(배우))의 양식화된 演劇(연극)만으로 演行(연행)된다.
  서양연극이 종교적인 祭儀(제의)에서 독립됨에는 연극이라는 機能(기능)을 통하여 보다 넓은 意味(의미)로 인간의 진실에 접근하려는 意志(의지)의 표현을 이성적으로 表出(표출)하였다면 한국의 전통연극도 독특한 양식을 통하여 그들이 살고 있었던 時代(시대)의 진실에 접근하고자 양식을 형성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서양연극의 현상은 역사와 더불어 끊임없이 變化(변화)하는 문화현상을 나타내고 있는데 비해 한국 假面劇(가면극)이나 人形劇(인형극)은 좀처럼 큰 變化(변화)없이 전승되어 온 데는 李朝(이조)란 사회적 현상을 크게 들지 않을 수 없으며 상류층으로부터 度外視(도외시) 당한 점, 그리고 연극장소가 야외였다는 점, 閉鎖的(폐쇄적)인 장소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演者(연자)(俳優(배우))들 스스로 賤民意識(천민의식)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예술가 이전의 ‘쟁이’, ‘廣大(광대)’로서 차별에 대한 抵抗(저항)을 나타내지 못하였다는 점 등이 극장 이전의 놀이적 성격을 띤 연극이었다는 점에서 자기개선의 절실함을 느끼지 못하고 전통만을 지켜내려 온 점이 어쩌면 특징이라 볼 수 있다.
  西洋演劇(서양연극)은 본래의 音樂(음악), 舞踊(무용), 台詞(태사), ‘마임’에서 끊임없는 변화와 자기개선을 통하여 音樂(음악)과 舞踊(무용)의 독립을 보고 대화극에 귀중한 自然主義(자연주의) 내지 寫實主義(사실주의)의 근대 西洋演劇(서양연극)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므로 合理主義(합리주의)요 科學主義(과학주의)인 근대 西洋演劇(서양연극)은 과거의 전통과 양식을 거부하는 현상을 나타냈다.
  이와 같은 현상은 ‘르네상스’ 이래의 精神革命(정신혁명)으로서 극장은 다만 오락만을 위한 장소가 아니라 문화의 선구적 역할을 하여왔던 것이다.
  開化期(개화기) 한국의 新演劇(신연극) 受用(수용) 자세가 서양근대사상의 이해부족과 主體意識(주체의식)의 확립없이 外形的(외형적)인 模倣(모방)이었다는 점이 문제였다고 볼 수 있다.
  더욱 劇場藝術(극장예술)의 體驗不足(체험부족)은 近代西洋演劇(근대서양연극)을 통하여 傳統演劇(전통연극)의 근대화작업이란 애당초 외면당하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물론 여기에는 西洋近代(서양근대) ‘리얼리즘’과 한국 고유의 전통적 연극양식과의 근본적 異質性(이질성)이 문제지만 계몽주의적 경향의 지식인들의 과거의 유산을 賤視(천시)하고 西歐文化(서구문화)에 대한 憧憬(동경)이 외면적인 면만 받아들이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놀이에서 극장예술로의 발돋움은 시초부터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것이 아니라 새것을 모방하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한국 傳統演劇(전통연극)은 근대적 자각으로 價値轉換(가치전환)을 시도했더라면 오늘의 한국연극의 양상은 훨씬 달라졌으리라고 볼 수 있다.
  山臺假面劇(산대가면극), 꼭두각시놀음 외에 한국에는 판소리(唱劇(창극))가 있다. 廣大(광대)(演者(연자))의 唱(창)이 중심이 되어 아니리(판소리에서 사용되는 일종의 대사)와 발림(唱(창)의 이면을 잘 표현하는 動作(동작))이 鼓手(고수)의 북 長短(장단)과 추임새(鼓手(고수)가 廣大(광대)의 唱(창)에 호흡이 잘 맞도록 소리를 내어 起興(기흥)을 시키는 것)에 맞추어 극적결과를 나타내며 作中의 여러 배역을 變身的(변신적) 효과로 표현하는 獨演形式(독연형식)의 특수한 연극 형태이다.
  山臺假面劇(산대가면극)이 庶民層(서민층)에 의해 口語體(구어체)로 口傳(구전)된데 반해 판소리는 우선 漢文(한문)이 주로 된 劇的文章(극적문장)이며 전문적으로 연마된 唱(창)의 體得(체득)과 辭說內容(사설내용)을 아니리, 발림으로 표현할 수 있는 풍부한 연기력의 소유자라야 함으로 상류층까지도 절대 愛護(애호)한 水準(수준) 높은 藝術性(예술성)을 지닌 연극이다. 원래 신라 花郞(화랑)에서 시발되었다고 하며 李朝(이조) 中葉(중엽)(西紀(서기) 17세기말 18세기 초) 河漢譚(하한담)과 崔先達(최선달)에 의해 開拓(개척)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李朝(이조) 末葉(말엽)(19세기) 申在孝(신재효)에 의해 비로소 戱曲化(희곡화)되어 판소리 文學(문학)의 定立(정립)을 보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판소리 辭說(사설)은 완연히 극적표현으로 된 양식이며 音樂(음악)을 통하여 표현되는 연극이다.
  판소리는 곧잘 상류층에서 여러 경사에 演戱(연희)되었다는 것은 판소리 辭說(사설)이 유교적이었고 多大數(다대수)의 인원이 필요 없고 獨演(독연)으로 장시간 섬세한 예술성을 즐길 수 있었고 특정한 장소가 아니더라도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손쉽게 演戱(연희)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獨演形態(독연형태)에서 容易(용이)히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것은 판소리 廣大社會(광대사회)가 集團行動(집단행동)에 결여되고 名人氣質(명인기질)을 優位(우위)로 내세우는 강한 예술가적 기질이 종합예술로서의 발전을 지연시켰다고 볼 수도 있다.
  한편 대조적으로 20세기 初頭(초두)에 일어났던 西歐(서구)의 演出家(연출가)들의 改革運動(개혁운동)과 주장을 상기할 때 개혁도 개선도 저항도 탈피도 傳統(전통)이 없을 때 意味(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Cordon Craig’의 舞臺藝術(무대예술)의 영원한 理想論(이상론)도 예술의 主觀(주관)이 배우와 작가와 관중이 아니라 演出家(연출가)라 하며 劇場主義(극장주의)를 확립하는데 主眼點(주안점)을 두었다. 그의 말을 빌린다면 “오늘의 俳優(배우)는 플라톤의 소위 模倣者(모방자)로 주어진 自然(자연)을 複製(복제)할 뿐인 것이다.
  그것은 複話術師(복화술사)에 지나지 않다. 내일의 배우는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며 더욱 明後日(명후일)의 배우는 創造(창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 하며 모든 방해되는 要素(요소)를 제거하며 實驗主義(실험주의)로부터 離脫(이탈)하였던 것이다.
  Meierholid도 사실주의 연극에 反旗(반기)를 든 연출가이다. 幕(막)없이 벌거숭이의 構成舞臺(구성무대), 有成的(유성적)인 音樂(음악)의 導入(도입), 律動的(율동적)인 연기로서 果敢(과감)하게 古典(고전)의 現代的(현대적) 解釋(해석)을 가하여 새로운 무대를 창조하였다는 점이 그것이다.
  Max Reinhardt같은 연출가는 第四壁(제사벽)을 무너뜨리고 극장의 機能을 살린 大劇場(대극장)을 통하여 日常生活(일상생활)의 모방에 빠진 自然主義(자연주의) 演劇(연극)에 色彩(색채)와 光澤(광택)과 律動(율동)을 주고 古典(고전)에 새 生命(생명)을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改革運動(개혁운동)의 母體(모체)는 전통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自然主義(자연주의) 내지 사실주의에서의 離脫(이탈)과 개혁을 東洋傳統演劇(동양전통연극)에서 발견하려 하였다는 點(점)은 어찌 보면 ‘씨니칼’한 것이다.
  얼핏 보면 전통과 창조는 대립되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나 實(실)은 동일하다고 볼 수 없다.
  傳統(전통)의 힘없이 어찌 창조가 誕生(탄생)되겠는가? 창조한다는 행위는 이미 전통적인 행위인 것이다.
  한국 연극의 토착화 문제는 바로 主體性(주체성)의 회복이며 外形(외형)의 形態(형태)로서의 전통의 延長(연장)이 아니라 傳統演劇(전통연극)과 新劇(신극)이 제각기 새롭게 극장예술로서 共存(공존)하며 신극은 신극대로 현실과 현실감 속에서 오늘의 人間性(인간성)을 창조하여 살아있는 연극이 마치 自己(자기)나라의 言語(언어)와 같이 個性(개성)있는 표현으로 土着化(토착화)되어야 할 줄 안다.
  傳統(전통)이란 過去(과거)의 것이다. 그러나 과거는 未來(미래)란 길 案內(안내)의 등불이다.
  傳統(전통)을 克服(극복)하는 창조력이야말로 現代(현대)를 사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西洋(서양)이 버린 문제에 매여달릴 主體性(주체성) 없는 開發(개발)보다 東洋(동양)의 많은 民俗傳統(민속전통)의 再發見(재발견)에 큰 關心(관심)과 기대를 걸어야 할 줄 안다.
  個性的(개성적)인 民族演劇(민족연극)이란 新劇(신극)과 전통극과 신극이란 두 개의 傳統(전통) 속에서 좁게 생각하지 말고 또 하나의 次元(차원)을 찾는 길이라고 본다.
  傳統(전통)은 어디까지나 傳統(전통)으로서의 價値(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우리의 精神的(정신적)인 支柱(지주)이다.
  新劇(신극)은 現代(현대)와 未來(미래)를 창조하기 위하여 전통이란 지주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發見(발견)을 통하여 自己(자기) 改善(개선)을 함으로서 眞價(진가)가 發揮(발휘)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60여년의 摸索(모색)과 방황에서 벗어나 주체성 있는 多樣(다양)한 創造活動(창조활동)이 되어야 할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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