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돈은 한마디로 치사한 돈이다. 무릇 돈이 치사하지 않은 게 있을까마는 스물이 넘어 일주일에 두 번씩이나 면도를 하는 처지에 용돈까지 얻어 쓰는 기분이란 조금만 기다리면 몇 배로 갚아준다고 백만원짜리 공수표를 남발해도 어색한 것은 어쩔 수 없다.
  뭐, 그렇다고 해서 양심에 거리낄 만큼의 용돈을 타느냐 하면 그도 아니다. 참 용돈이랄 것도 없는 만큼의 액수(공개하기 부끄러울 정도의)를 하루살이처럼 구두 신으며 딴 데 보다가 슬쩍 받아 쥐고 나온다. 사실 부모한테 내가 언제 보통예금 해놓은 것도 아니고 무작정 얻어먹는 처지에 액수의 많고, 적음을 따지는 게 될 법한 소리는 아니지만 불평 않을 수가 없다.
  대학생이라는 게 묘한 입장이다.
  이건 어린애도 아니고 돈 버는 능력이 있는 어른도 아니다. 하지만 어울리다 보면 어른 하는 짓은 모두 해야 한다. 술 마셔야지 당구 쳐야지 또, 사지가 멀쩡하고 오관이 반듯한 이 몸이 여자 몇 거느린다고 흉 될 것 하나도 없다. 그런데 재건 데이트도 한두 번이고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는 것도 어쩌다이지 노다지 계집애보고 내라거나, 5․16광장에서 4․19탑까지 걸어만 다닐 수도 없지 않으냐 이거다. 그래도 사내대장부다. 여자가 열 번 내면 한번은 내야 마땅한데 열 명 만나면 열 번 쓰는 셈이 된다. 용돈이라 해봤자 차비, 점심값, 차 한 잔 값 그리고 등록 때나 책살 때 떼는 공식적인 커미션을 제외하고는 도무지 부수입이 없다. 자존심은 살아서 일이만원짜리 아르바이트는 안중에도 없다. 그러자니 나날이 적자요 시계는 노다지 내 팔목 아닌 다른데서 휴가를 즐긴다. 용돈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왕년에 알바이트 안 해본 놈이 몇이나 되랴. 본인은 조숙하셔서 일찍이 중학교 2학년 재학시에 고매한 인격과 풍부한 지성으로 중학교 1학년, 초등학교 5학년 두 형제의 사부로서 늙으신 부모님의 곁을 떠나 가정교사로 부임했었다.
  또한 신문배달도 겸해 막강한 신문부수를 확보하여 총무보다도 세력이 커서 말썽이 날 정도의 수완을 보인 몸이다. 사바사바하는 솜씨도 출중해서 한 달에 3만원 수입은 우스웠다. 옛날 3만원은 큰돈이다. 중학교 2학년짜리에게. 옷도 해 입고 별거 다했다. 전부 용돈으로 썼다. 지금 생각해도 약간은 싸가지 없는 짓이었다. 모조리 마시고-건방지게도 알콜끼 있는 음료- 먹고 그랬다. 정말 용돈은 한이 없다. 안 쓰는 데는 한이 있어도 쓰는 데는 한이 없다. 요즘은 딴 데 신경 쓰지 말고 공부나 잘하라는 엄명에 빌빌 대고 있다. 용돈이고 지랄이고 돈이 없으면 어깨가 물에 젖은 뻥튀기마냥 후줄그레해지는 게 누구 만나기가 고역이다. 애가 꼭 병신 같아진다. “젊은이가 돈이 무슨 상관이냐, 젊음이 있는데”하고 말한다.
  개는 달밤에나 짖는 것이다. 돈 없으면 그게 그런 게 아니다. 내가 말하자는 것은 지금 어떤 고상하고 지적인 것에의 도달을 말하자는 것이 아니고 나날의 생활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지성적인 데의 열망 역시 책 사 볼 돈, 환경이 아쉽다.
  돈은 있고 볼 일이지만, 빈곤을 음미하는 것도 그럴 듯하다. 오뉴월 터진 논처럼 마른 주머니에 돈이 조금 떨어질 때, 용돈은 꿀맛이다.
  요즘 일년간 돈이라는 것과 인연이 멀었다. 그 전은 별로 쓸 데가 없었으니 문제도 안 된다. 우리 어머니는 자타가 공인하는 스크루우지의 8대손으로 막강한 절약정신을 지녔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존경하지만 좋아하지는 않는다. 당장 괴롭다. 나는 요사이 뵈기 싫기만 하던 아버지가 은근히 맘에 들어간다. 어머니한테는 돈 달라고 백년 염불해 봤자 일정량 이상의 것은 생각조차 힘들다. 이럴 때 나는 아버지와 세대 간의 차이를 대화로 메꾸자면서 손을 벌린다.
  하지만, 적어도 그런대로 괜찮다. 나는 하루에 이백원 들고 학교에 오지만 터무니없는 부족함 가운데 그것을 메울 수 있는 우정과 애정을 느낀다. 정말 우리에게는 용돈을 어떻게 벌며, 얼마를 갖는 것보다는 그 용돈을 어떤 시간에 어떤 용도로 쓰는가가 문제이다. 많은 용돈은 많은 시간의 허비를 가져올 수도 있는 문제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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