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문학)은 傳統(전통)과 革命(혁명)의 産物(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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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오르규’는 이런 말을 했다. 南阿(남아)에는 풍란이라는 식물이 있다. 이 식물뿌리가 아주 섬세하며 거목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식물은 나무를 타고 올라가서는 꼭대기에 오르며, 그리고는 하늘을 향해 곱게 자란다. 이 식물은 태양으로부터 공기에서부터, 하늘에서부터 영양을 섭취한다. 이 식물은 땅에서 영양을 섭취하지 않고 하늘에서…
  요즘에는 시를 쓴다는 사람이 참 어려운 일을 한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우리들의 마지막 보루라는 생각이, 역사가 다시 시작한다면 결국 이 불쌍한 사람들을 틀어잡고 시작되어야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그러나 아무리 노력을 한다 하여도 그 결과가 초라할 때 그들에게 뱉는 야소는… 요즘 나는 소설에 시에 평론에 오물이라도 던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인간을 사랑하자고 인간을 위한 순교자가 되어야 한다고 외쳤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인간이 무엇이냐는, 인간이 무엇이냐는, 인간의 무엇을 사랑하고 있었느냐는 질문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사랑하는 것은 인간의 무지였다는 생각을 비로소 발견하였던 것이다.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의 무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비록 인간의 안식처를 뺏는 일일지는 몰라도 무지의 상태에서 有知(유지)의 상태로 올려야 한다.


  <2>

  한마디 한 줄이라도 진실된 것, 본질적인 것을 쓰고 싶다. 정말 본질적인 원형의 이야기를 본질적인 이데아를, 하늘을 우러러보며 하늘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 우리의 사고가 막혀있는 이 질식된 상태를 뛰쳐나가는 새로운 것을 말하고 싶다.
  ‘李箱(이상)은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한다.
  ‘위대한 영웅이 한 사람 탄생되기 위해서는 많은 병사들이 희생되어야 한다. 위대한 예술가가 탄생되기 위해서 무명의 많은 예술가가 희생되어야 한다’ 얼마나 마음에 드는 말인지 모른다.
  나까지가 무명의 예술가가 될지도 모르지만 나의 희생이 위대한 예술가를 탄생시키는데 쓰여진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조금은 원통하지만은) 지금의 예술가는 위대한 예술가를 위한 희생까지가 될 수 없으니 말이다.


  <3>

  실은 별거 아닌 것들에 우리의 신경을 너무 낭비해 버리는 일이 너무 흔한 것 같다. 좀 더 근본적이고, 모두의 가슴을 옮길 수 있는 본질이 따로 있다.
  우리가 꼭 배울만한 언어나 정신 같은 것보다는 서로 교환하는 사이 그 핑계로 더 열심히 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아무데나 얼굴 내미는 詩(시)들. 여간 어쭙잖아 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것을 찾을 수 없으니 말을 하지 않는 게 상책일까. 詩(시)에는 生命力(생명력)이 넘쳐흘러야 한다는 생각이다. 너무나 기본적인 것이지만 자칫 잊고 修辭(수사)가 제일인양 써버리니 말이다.
  생명과 생명 사이에서 넘쳐 솟는 詩(시). 마치 正午(정오)에 꿋꿋이 서있는 어떤 殉敎者(순교자)의 목소리 같이.
  분명 거짓소리가 아님을 확신해야 한다. 지금은 뚜렷한 자신의 목소리가 중요하다. 마치 유행처럼, 자신을 잊은 채 얼떨결한 사이 써 있는 시들을 추방해야 한다.
  文學(문학)은 자기 하나의 도취의 手段(수단)이 아니며 ‘모두의 자랑’으로 나설 수 있는 傳統(전통)과 革命(혁명)의 産物(산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두 作業(작업)에 決判(결판)을 낼 수는 없다. 生存(생존)이 문제인 사람들의 목숨은 짧지만 生命(생명)을 接受(접수)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모든 사람들의 귓가에 메아리 칠 것이다. 아직도 詩精神(시정신)과 藝術性(예술성) 사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꼭 무엇인가 찾아 스스로 克服(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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