悲劇(비극)作家(작가)를 中心(중심)으로

  비극은 古代(고대) 그리이스의 ‘Tragoidia’에서 그 語源(어원)을 찾을 수 있다. 山羊(산양)이라는 ‘Tragos’와 노래(歌(가))라는 (Ode)말의 合成語(합성어)로서 山羊(산양)의 노래라는 뜻이 內包(내포)되어있다. 오늘에 와서 다소 一致(일치)되지는 않지만 어쨌든 오늘날 文藝(문예)의 한 장으로서의 悲劇(비극)은 人間(인간)의 意志(의지)와 行爲(행위)를 精神的(정신적)인 힘으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갈등, 다시 확인하면 괴로운 狀態(상태)에 두어 表現(표현)한다. 또한 사건의 全(전)過程(과정), 특히 그 종말에 있어서 悲壯美(비장미)를 갖게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人間(인간)의 감정은 환희, 희열, 기쁨, 쾌락 등 喜劇的(희극적) 要素(요소)보다 고통, 번뇌, 환멸 등 悲劇的(비극적) 要素(요소)가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 비극적 요소는 實生活(실생활)에서 많이 느끼는 감정이기 때문에 모든 文藝(문예)에서 묘사된 비극성에 共感(공감)을 갖는다. 그 공감으로 인해 ‘카타르시스’를 느낌으로 기쁨을 얻는다. 이 ‘카타르시스’를 통해 産出(산출)되는 기쁨에 비극의 생명이 있다고 본다.
  演劇史(연극사)에서 보면 희랍시대의 비극 역시 당시 사람들에게 무한한 공감과 기쁨을 주었다. 그들은 自然(자연)과의 관계, 運命(운명)과의 天意(천의)를 동기로 삼아 宗敎的(종교적) 思想(사상)을 모태로 웅장한 영웅이 쓰러지는 파국과 함께 비극의 門(문)을 열었다. 그들의 비극성은 인간의 외부와 내부에서 파괴하려는 힘과 괴롭히려는 악의 힘에 의해 비극성을 창조했다.
  인간은 이 악의 힘에 투쟁하므로 여기에 필연적으로 수난이 따르게 되고 이 수난은 인간에게 고통을 주고 참기 어려울 만큼 압도감을 주지만 결국 이 수난이야말로 인간을 고상하게 만들고 높은 수준에까지 끌어올리는 것으로 보았다.
  인간의 파괴를 돕는 모든 惡(악)에도 불구하고 모진 시련과 수난을 참고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선 온갖 고역과 투쟁을 겪는 불요불굴의 영웅정신을 우리는 보게 된다.
  당시 비극에 있어서 주인공은 수난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이것을 통해서 배우게 됨으로써 人間(인간)은 적극적 가치를 찾게 되고 보통 인간으로서는 꿈도 꾸어보지 못할 정도의 높은 人間(인간) 수준에 달하게 되는 것을 희랍비극에서 볼 수 있다. 이러한 비극성은 희랍시대에서부터 현대까지 비극성의 정수를 이루고 있다. 희랍시대의 대표적 비극작가인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프스王(왕)’은 테베의 王(왕) ‘외디프스’가 기구한 運命(운명)의 作戱(작희)로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살면서도 이 悲運(비운)을 알지 못하고 나라를 다스리던 중 마침 테베에 怪疾(괴질)이 발생하자 使者(사자)로부터 이 사실을 認知(인지)하게 되었다. 이어 자기의 눈을 찔러 盲人(맹인)이 된 채 天下(천하)를 방랑하는 人間(인간)이 되어버리는 얘기다.
  이는 곧 인간이 모든 外部的(외부적) 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자유의지를 발휘함으로서 인간정신이 고도의 수준에까지 도달하는 숭고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당시 비극의 주인공이란 善(선)하거나 정직한 것이 문제가 아니며 냉철한 理性(이성)에 의해서만 행동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비극적 주인공의 파멸은 악하거나 타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비극적 주인공이 지니고 있는 자신의 성격결함이나 오류에서 온다고 定義(정의)하고 있다.
  그러므로 비극적 주인공의 파멸이 비극적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悲劇(비극)의 주인공은 신분이 높은 王(왕)이나 황태자 같은 인물이어야 했다. 평범한 무명인이 파멸할 때보다 신분이 높고 번창일로의 사람이 파멸할 때가 더 실감 있고 큰 悲劇的(비극적) 感情(감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극성은 ‘셰익스피어’의 비극에서도 공통적이라 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희랍시대 비극의 경건이나 運命的(운명적)인 것은 없고, 다만 희랍悲劇(비극)에서 본 것처럼 비극적 감정을 조성하기 위해 유령이나 마녀, 또는 우발적인 것을 劇(극)에 끌어들였다.
  당시의 주인공 역시 신분이 높거나 위대한 ‘스케일’위에 바탕을 두고 있다. 王(왕)이나 황태자 아니면 ‘부르터스’와 ‘안토니’처럼 국가지도계급이었고 ‘오셀로’나 ‘맥베드’처럼 국가장군. 아니면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명문의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社會的(사회적) 위치는 곧 사회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그러한 인물이 갑자기 붕괴될 때는 평범한 인간이 붕괴될 때 보다 더욱 더 큰 연민과 경탄을 자아내게 된다. 이들 주인공들은 희랍비극처럼 어떤 외부적인 힘에 의해서 파멸하기 보다는 주인공 자신이 지니고 있는 성격의 결함이나 오류에서 붕괴되고 만다. 섹스피어는 비극성을 어떠한 운명의 힘에 의하여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막대한 善(선)을 희생하면서까지 그의 비극이 도덕적 질서를 구현하고자 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비극을 감상하고 절망적으로 느끼지 않는다.
  그것은 비극적 수단이 인간과 운명의 충돌에서가 아니라 도덕적 질서와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惡(악)과의 충동에서 생겨나기 때문에 막대한 선의 대가를 치름으로서 평정을 찾게 된 주인공들의 승리의 얘기다.
  죽음으로 청산한 ‘로미오와 줄리엣’은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 동시에 사랑의 승리를 보여준다.
  이처럼 비극에서는 패배보다는 승리에서 오는 희열로 인해 해소되는데서 더욱 비극의 생명을 느끼는 것이다. 고전주의 작가 ‘라시느’의 비극 역시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폭군 ‘네로’의 일생을 그린 ‘브리라니쿠스’ 로마의 황제 ‘데이도우’와 유태의 王女(왕녀) ‘베네레니스’와의 사랑을 그린 ‘베레니스’의 主人公(주인공)도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희랍시대의 전설이나 신화보다는 史實(사실)이 필요하였고 인간과 그 정열을 본질적 목적으로서 實在(실재)한 그대로의 현실과 인간으로서 묘사하고 있다. 이들 비극작품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가련함과 무서움을 통하여 오는 ‘카타르시스’에서 생기는 기쁨에 있다”라는데 공통점을 둔다.
  그래서 비극의 주인공을 전적으로 惡漢(악한)으로 취급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또 순수하고 厚德(후덕)한 人物(인물)도 아닌 그 중간에 위치한 인물일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 인물은 한편 有能(유능) 高貴(고귀)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적인 약점을 가지는 것이 비극의 주인공으로서 적합하다. 이러한 인물로 하여금 여러 가지 절대적인 힘과 대립하여 항쟁하고 고투해가면서 자기의 의지를 강력히 주장하여 마침내 운명을 자초하게 하는데서 비로소 비극적 생명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야스퍼스’는 그의 비극론에서 ‘비극적인 것을 볼 때는 그것을 직접 본다는 것으로서 비극적인 것으로부터 일종의 정화, 해탈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볼 때 비극이 비극으로써 생명을 지니려면 가련함과 무서움에서 느낀 고통감으로서 끝난 것이 아니다.
  그러한 고통감이 전체에 통하는 일반적 보편적 정신으로써 인간의 마음 속 깊이 진동과 앙양을 줌으로써 기쁨을 만끽하는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극의 생명은 비극에서 경험한 ‘카타르시스’를 통해 산출되는 극한의 기쁨에 가치를 더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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