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소리 없이 내리던 봄비가 별안간 우박을 동반하여 거세게 퍼붓더니 오늘은 이렇게 화창할 수가 없다.
  겨우내 월동을 위하여 지하실 속에 옮겨 두었던 몇 그루의 芭蕉(파초)를 캐내어 바깥뜰로 옮기는 작업도 이젠 힘에 겹다.
  작년에는 그래도 한 나무에선 마치 대포알과도 같은 열매가 맺어 우리집 아이들은 바나나가 열렸다고 제법 신기해했다. 어쨌든 금년에도 우리집 자그마한 연못가엔 오늘부터 여름 채비를 위하여 아직은 볼품없는 파초가 허수아비처럼 여러 개 섰다.
  멀지 않아 꽃 시새움이 가고, 아지랑이 피면 이 허수아비 같은 줄기에도 물이 올라, 잎은 다시 피어날게고, 그러면 나는 연못가 분수의 고동을 마음껏 틀어 그 잎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를 들으며 흔들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조용히 생각하리라.
  수년전 그러니까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수학하던 어느 해 여름방학, 17개국 남녀교수와 연구원 30여명이 함께 그곳 대학 국제부에서 주관한 九州(구주) 관광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적이 있다.
  모지(門司(문사))에서 후꾸오까(福岡(복강)) 해안을 끼고, 혹은 버스와 기차, 배를 번갈아 타며 佐世保(좌세보)․長崎(장기)․天華(천화)․熊本(웅본)․鹿子島(녹자도) 그리고 최남단인 Ibski(脂宿(지숙))을 지나 佐田岬(좌전갑)까지, 다시 ?島(?도), 霧島(무도), 宮崎(궁기), 日向美美津(일향미미진), 延岡(연강), 高千穗(고천수), 阿蘇(아소), 別府(별부)로 남태평양을 끼고 북상하여 마음껏 아열대의 피닉스, 슈로, 바나나 등이 숲을 이루고, 유황물이 분수처럼 치솟던 그들의 나라를 돌아보며, 한때나마 남극의 풍경과 이국정취에 빠졌던 때가 있었다.
  이때가 생각날 적이면 나는 간혹 그때의 일기장을 뒤지며 앨범을 펴보기도 하지만 오늘도 서둘러 벌써부터 내 연못가에 여름채비를 하고 있는 것도 어쩌면 그때의 그리움 때문일까?
  올해도 나는 찌는 여름이 보잘 것 없는 연못가 그 몇 그루의 파초잎 위에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를 들으며 이젠 다시 만날 수조차 없는 그 피부색이 다른 이방인의 모습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이 일기장을 펴고 그 따사롭던 인정과 대화를 다시 한 번 기리고자 한다.


  1971.8.25 (수) 맑음

  묘지에서부터 4일간 우리를 안내했던 産交(산교) 버스와 그 차장이 오늘 아침 ‘아마쿠사’를 떠나면서 퍽 쎈치해지더니 ‘구마모도’에 닿자 성내를 안내하곤 마지막으로 우리와 작별을 고한다. 수년을 사귀어온 인간의 석별의 정도 이만하면 만점이다. 이로부터는 남국의 풍정이 완연해 온다. 차창 밖으로 피닉스 슈로 야자수 등 가로수가 즐비하고, 그 너머 멀리 ‘사꾸라지마’, ‘기린지마’ 등 많은 섬들이 서쪽 바다를 타고 차창 밖으로 기어든다. 여태까지 보아온 협만과는 대조적이다.
  점점 남단으로 오고 있는 탓일까. 차츰 물도 맑아오고 찌는 듯한 더위 아래 나무들도 맥없이 축 늘어져 보인다. ‘이브스키’에 도착한 것이 4시 반, 잠시 호텔 안 쟝굴온천에서 땀을 씻고 피닉스로 해안을 덮은 부둣가에 나오니 모래사장에서는 벌써 먼저 나온 친구들이 모래 찜질을 즐기고 있다. 잠시 남태평양 물에 발을 담그고 들어와 식후 침대에 누웠으나 잠이 오질 않는다. 마침 인도네시아의 ‘스라르소’씨가 찾아와 우리는 일행인 오지리의 ‘라고샤’, 벨기에의 ‘고르모’ 여사와 함께 이국의 스낙룸에서 시원한 맥주와 쥬스로 목을 축이며 하와이언 음악을 즐긴다. 돌아와 나는 예쁜 그림엽서에 집과 학생들에게 편지를 쓴다.

  1971.8.26 (목) 맑음

  페라리호로 ‘이브스키’를 떠나 佐田(좌전)까지 망망한 대해가 더욱 권태롭다. 이 물이 태평양으로 흐르는가? ‘本土最南端(본토최남단) 佐田岬(좌전갑)’란 나무 팻말에는 위도 31도선이라 표시되어 있다. 아열대 식물인 야자수와 바나나 숲을 헤치고 그 정상인 전망대에서 본다. 동으로는 동지나해와 서로는 태평양 그 물이 합수되는 지점이란다. 다시 佐田灣(좌전만)으로 나와 ‘사꾸라지마’(櫻島(앵도))로. 이곳은 용암으로 섬 전체가 풀 한포기 없는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화(昭和) 초년에 적은 섬이 확산으로 폭발하여 이렇게 큰 돌섬이 되었단다. 그리고 그 미진이 北海道(북해도)까지 영향을 주었다니 알만도 하다.
  ‘기리지마’(霧島(무도))에 아직 용암이 솟고, 온천 연기가 온통 산을 덮는 ‘기리지마’ 神泉館(신천관) 호텔에 여장을 푸니 이젠 피곤이 겹친다. 더운 유황물에 몸을 적시고 나니 한결 낫다.

  1971년8월29일 (일) 비

  神樂(신악)의 발상지로 유명한 전설의 계곡 ‘다까지호’(高千穗(고천수))를 떠나 阿蘇(아소) 의 白雲(백운) 산정으로 오른다. 이 초원 푸른 고원에는 들소가 주인의 이름을 등에 새긴 채 한가로히 풀을 뜯는 모습도 이채롭다.
  비가 멎자 귀여운 아르젠틴 아가씨가 달리는 버스 속에서 고고춤을 춘다. 고원 하이웨이가 멋지게 열린 연변엔 움푹움푹 패인 호수들이 차창으로 들어오며, 평화로이 풀을 뜯는 말과 소들이 호수가로 배회한다. 정상일까? 멀리 산 속에 아직도 화산의 연기가 구름처럼 오르고, 바위를 녹이는 붉은 용암이 치솟고 있다. 목을 축이고 서서히 초원을 내린다.
  해발 1592m, 차안에서는 여전히 남국의 음악이 스피커를 통하여 들려온다. 이곳 阿蘇(아소) 국민숙사에 짐을 푼 것이 저녁 여섯시. 이젠 목욕에도 지치고 십여일 긴 여행에 모두 피곤한 얼굴들이다. 창밖 초원에는 조선촌이 아직도 있다는 어제 高千穗(고천수)와 같은 우리나라 국화인 무궁화가 줄지어 쓸쓸히 찬비에 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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