萬洙(만수)녀석의 오바이트를 처리하던 신고식 때부터 고생문은 훤히 열려 있었다. 그 날 집어탄 천호동행 막차가 그리 낯설지 않았던 것도 우연만은 아니었다.
  東岳路(동악로). 그놈의 가파른 언덕길을 정말 눈썹이 휘날리도록 뛰어 오르내리며 몇 번이고 ‘記事(기사)는 발로 써야 하느니라’고 이야기하던 上輩(상배)와 中輩(중배)님들의 말을 되새기곤 했다. ‘新聞社(신문사) 문 열던 이래로, 아니 太古(태고)이래로 修習(수습)은 뽕빠지게 뛴다.’
  앞대가리에 ‘修習(수습)’이란 딱지를 붙인 놈들의 눈물겨운 特權(특권)인 發送(발송)은 지독한 고독을 맛보게 했다. 19뭉치의 신문더미보다 더 걱정스럽고 무서웠던 것은 늦게나 기어오던 용달차. 내가 曰(왈), ‘女記者(여기자)는 뽑지 말자.’ 翼斗(익두) 曰(왈) ‘옳소.’
  시간이 날 때마다 ‘○○劇場(극장) 理事會(이사회)’란 때깔나는 이름아래 동시상영 2백원짜리 영화를 마치 ‘게라’보듯 열심히 봤다. 그리하여 천호동행 막차는 또 내 차지였다.
  O․K대장을 넘기곤 종이비행기에 ‘이어도’, ‘女子(여자)들만 사는 거리’라고 가고 싶은 곳을 적어 날렸지만 밤 11시, 가장 가고 싶은 곳은 우리 엄마가 기다리는 내 집이었다.
  ‘야, 자식들아 수습 떨어졌으니 한잔 해야지.’ 하며 술집 문턱을 넘어야 할 날, 동일이 녀석은 백령도에 취재가고 없었다. 東逸(동일)이 녀석, 拉北(납북) 당하지 않고 무사히 돌아오면 같이 修習(수습)을 휴지통에 구겨 넣어 버리곤 동동酒(주)라도 한잔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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