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現代(현대)의 倫理的(윤리적) 方向(방향)-

  ○ 다음 글은 鷖山文學會(예산문학회)(회장=李丙疇(이병주))주최 第(제)一回(회) 民族文化(민족문화)講座(강좌)에서 主題(주제) 發表(발표)를 한 趙演鉉(조연현) 敎授(교수)의 ‘文學(문학)과 倫理(윤리)’를 간추린 것이다. 지난 달 27일 本校(본교) 工大(공대) 세미나실에서 열린 이 民族文化(민족문화)講座(강좌)는 월 1回(회) 각 大學(대학)을 순회하면서 열린다. ○


  文學(문학)은 다른 예술과는 달리 言語(언어)라는 복잡하고도 강력한 매개 형식을 가진 예술이므로 藝術的(예술적)인 대상이 되는 동시에 다른 어떤 예술보다도 가장 강력한 사회적인 대상이 된다. 이것은 미술의 매개형식인 색채나 음악의 매개형식인 음들과 같은 것이 주로 감각적인 기능을 더 많이 가진데 비해서 言語(언어)는 감각적인 기능은 물론 實用的(실용적), 政治的(정치적) 그 밖에 온갖 社會的(사회적)인 모든 기능을 다 가지고 있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文學(문학)은 다른 모든 예술과 마찬가지로 늘 예술적으로 형수 되면서도 다른 어떤 예술보다도 항상 사회적인 문제의 대상이 되어 왔다.
  ‘입센’의 ‘인형의 집’이 문학적으로 더 많이 문제가 되어왔는가, 남녀 同等權(동등권)의 문제로서 더 많이 논의되어 왔는가 하는 것도 그러한 사정의 일단을 보여주는 일례가 된다. 나는 文學(문학)이 예술적인 문제로서 더 많이 논의 되는 것을 반드시 찬성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문학이 그렇게 문제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문학의 숙명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것은 言語(언어)의 사회적인 기능에서 문학이 완전히 떠나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여러 가지 문제 중에서 나는 문학과 윤리와의 문제를 이 자리에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것은 서사적인 문학(소설이나 희곡과 같은)을 중심으로 바라 볼 때 윤리적‧도덕적인 문제가 늘 그 중요한 주제를 이뤄왔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고대소설이 권선징악을 주제로 삼아 온 것도 그러한 경향이고 남녀의 애정문제를 취급한 대부분의 작품들이 그 애정문제를 감각적인 쾌락으로서만 다루지 않고 도덕적인 윤리적 차원에서 다루어 온 것도 그러한 경향의 일면이다. 그러한 경향은 古代文學(고대문학)이나 近代文學(근대문학)이나 다 마찬가지다.
  道德的(도덕적) 倫理的(윤리적)인 표현은 비단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입센’의 ‘人形(인형)의 집’도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도 다 마찬가지이다.
  흔히들 남편과 자녀를 버리고 달아나는 ‘노라’를 반도덕적 반논리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더욱이 ‘채털리의 사랑’은 道德(도덕)이나 倫理(윤리)를 파괴하는 극단적인 작품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여러 나라에서 판매금지 되고 재판에 회부되고 했던 일들이 그것을 인증한다. 그러나 두 작품은 ‘춘향전’이나 ‘심청전’과 마찬가지로 윤리적 도덕적인 문제를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추구한 작품이다. 윤리적인 것 도덕적인 것, 이것은 인간이 동물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인간적 존재로서 살아가는 하나의 가치의 표준이다.
  人間(인간)이 動物(동물)이 아닌 이상 人間(인간)답게 살아가는 하나의 方式(방식)이 하나의 規範(규범)이 倫理的(윤리적) 道德的(도덕적) 체계이다. 그러나 그러한 가치의 규범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時代(시대)의 변천에 따라 변용될 수밖에는 없다. 어제의 도덕과 오늘의 도덕이 다른 것은 이 때문이다. ‘노라’나 ‘채털리 부인’은 그들의 행동이 옳고 그릇되고 한 것과는 상관없이 새로운 윤리적 도덕적인 한 모색이 된다.
  우리나라의 詩歌(시가)를 보면 ‘임’이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이것은 ‘임’이라는 말 속에 우리 조상들의 정신이나 生活(생활)感情(감정)이 스며들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 뜻은 사람에 따라 경우에 따라 서로 다르게 나타나지만 ‘임’에 대한 感情的(감정적) 倫理的(윤리적) 의미에 있어서는 서로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정몽주>
  내 언제 신이 없어 임을 언제 속였관듸 / 월침 삼경에 온 뜻이 전혀 없네 / 추풍에 지는 잎소리 낸들 어이 하리오. <黃眞伊(황진이)>
  위의 두 개의 時調(시조) 中(중) 전자는 임금에 대한 忠誠心(충성심)을 나타내 보여주고 있고 후자는 애인을 기다리는 안타까운 심정을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전자는 임금님의 忠君(충군) 사상의 표현이고, 후자는 사랑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임금님이나 애인이 하나의 존재로서 의식 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조금도 차이가 없다. 이것은 두 時調(시조)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옛날 詩歌(시가)에 나타나 있는 모든 ‘임’이 다 그러한 ‘임’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임이 근대의 우리의 韓國(한국)에서는 점차로 그 모습을 숨겨온 것은 사실이다. 우리의 근대시가나 현대시에는 이미 ‘임’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옛날의 그 아름다웠던 ‘임’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1920年代(년대) 詩人(시인) 중에서 우리는 韓龍雲(한용운), 金素月(김소월) 두 사람을 기억하고 있다. 이 두 시인은 ‘임’이 상실되어가는 時代(시대) 속에서 옛날의 詩人(시인)처럼 ‘임’을, 아니 ‘임’만을 노래한 유일한 시인이다.
  韓龍雲(한용운)의 ‘임’은 때로는 祖國(조국), 때로는 친구, 때로는 眞理(진리)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났고 金素月(김소월)의 ‘임’은 오로지 애인으로서만 나타나있다. 이 두 詩人(시인)이 노래한 ‘임’이 옛날의 우리 祖上(조상)들처럼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칠 절대적 對象(대상)으로서 제기된 것만은 옛날과 조금도 다름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임’으로서 상징된 삶의 한 形態(형태)가 그대로 유지 계승된 것을 意味(의미)한다. 1920年代(년대)에 하구 많은 詩人(시인)만이 홀로 아직도 빛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이 두 시인이 옛날의 멋과 아름다움을 계승했다는 의미에서보다는 아직도 그것이 우리 韓國(한국)의 멋이요, 아름다움이었던 까닭에서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과 자기의 전 생애를 바치는 사람은 아직도 많고 조국이나 민족을 위하여 아무런 보상도 없는 자기희생을 감수하는 애국자는 오늘날에도 많은 것이다. 진리를 위하여, 정의를 위하여 스스로의 모든 것을 바치는 순교자가 현대의 우리 한국에는 누가 없다고 말할 것인가?
  조국, 애인, 진리, 정의, 이 모든 것이 바로 ‘임’이 아닌가. 자기가 그것을 위하여 살고, 그것을 위하여 죽을 수 있는 것은 다 ‘임’이다. 임은 죽지 않고 한국 사람들의 정신과 사상 그리고 모든 분야의 生活(생활)倫理(윤리)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국립묘지에 안장된 저 무명용사들의 勇氣(용기)를 통하여 一生(일생)을 한 가지 일에 봉사해 온 藝術家(예술가)나 學者(학자)의 한결같은 一念(일념)을 통하여 죽음을 넘어선 진실한 각종의 사랑을 통하여 ‘임’은 면면히 이어져 왔고 오늘의 한국에 살아가고 있다.
  ‘임’은 바로 삶의 의미이다. ‘임’의 倫理的(윤리적) 의미를 現代文學(현대문학)이 어떻게 추구할 것인가. 이 시대의 윤리적 空虛(공허)를 메워가는 現代文學(현대문학)의 한 과제를 이런 곳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것일까? 새것은 항상 묵은 것 속에서 발견되어 온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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