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洋的(동양적)인 그 本質(본질)과 現實(현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나 (我)>가 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저절로 느끼고 아는 내가 나라는 <나>이다. 그 <나>는 자기만이 느끼고 아는 <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배우지 않고서도 나면서부터 느끼고 아는 <나>이다. 본래의 <나>는 벌거벗은 알몸이다. 그 <알몸>속에서 아니면 적어도 그 <알몸>과는 결코 떨어질 수는 없는 곳에서 그 <알몸>만을 <나>라고 생각하는<마음>이 있다. 그 <마음>이 그 <알몸>을<나>라고 생각할 때에 그 <마음>은<내 마음>이 되고 그 <알몸>은 <내 몸>이 된다. <내 마음>이라고 할 때에는 몸에서 떠나지 못하면서 몸을 <나>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마음이며, <내 몸>이라고 할 때에는 마음이<나>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몸이다. <나>는 本質的(본질적)으로 몸과 마음의 二元的(이원적) 存在者(존재자)이다. <나>의 몸과 마음을 서로 反對(반대)되는 듯이, 또는 서로 모순되는 듯이 槪念的(개념적)으로 생각할 때에는 <나>는 對立的(대립적) 同一者(동일자)이기도 하고 辨證的(변증적) 統一者(통일자)이기도 하다. <나>에 <大>와 <小>라는 추상적 형용사를 붙여서 <大我(대아)>라든가 <小我(소아)>라든가 하는 말이나 개념을 사용하게 된 근거는 歷史的(역사적)으로 보나 論理的(논리적)으로 보나 <나>의 本質(본질)이 그러한 二元的(이원적) 存在者(존재자)인 데에 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同一(동일)한 <나>에 <大>와 <小>의 둘이 있다고 생각할 때에 내용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原理的(원리적)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첫째는 <몸>의 방향을 大我(대아)라 생각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에는 <마음>의 방향은 小我(소아)라고 생각된다. 둘째는 <마음>의 방향을 大我(대아)라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에는 <몸>의 방향은 小我(소아)라고 생각된다. 셋째는 <몸>과 <마음>을 둘 다 지양적으로 부정하면서 <몸>도 <마음>도 둘 다 小我(소아)로 보고, <몸>도 <마음>도 아닌 <제3의 어떤 것>이 大我(대아)라고 생각되는 경우이다. 洋(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역사상에 나타난 大我(대아)의 본질은 그러한 세 가지 원리적 경우를 벗어나지는 못하였다고 생각되지만 그러나 구태여 동양적 大我(대아)의 본질적 특징을 말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몸과 마음을 아울러 가지면서도 몸도 마음도 아닌 그 어떤 제3자를 大我(대아)라고 보는 데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동양적 大我(대아)의 종류를 구별 지어서 말한다면 또 동양적인 것은 고전적이고 종교적이고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동양적 대아의 類型(유형)을 대략 印度敎(인도교)의 梵我(범아), 佛敎(불교)의 佛菩薩(불보살), 道敎(도교)의 道人(도인), 儒敎(유교)의 聖人君子(성인군자) 등으로 대표시킬 수가 있고, 또다시 그들 하나하나의 특징을 위에 말한 세 가지 원리적 방향에서 구별 짓는다면 梵我(범아), 佛菩薩(불보살), 道人(도인)은 더욱 제3자적 대아이고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제3자적 변증적 大我(대아)는 佛菩薩(불보살)과 道人(도인)이라고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동양적 대아의 그러한 제3자적 본질을 나타내는 文證(문증)들이 물론 많이 있지만 그 하나씩을 든다면 다음과 같은 것들도 있다. 인도교의 보리하드 아라냐까 우파니샤드(1․4․10)에 <나는 브라흐만이다 Aham Brahmasmi>라고 있고 불교의 華嚴經(화엄경) 夜摩天宮菩薩說偈品(야마천궁보살설게품)에 <마음과 부처님과 우리들과의 셋에는 차별이 없다. 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심불급중생시삼무차별)>이라고 있고 유교의 中庸(중용)에 <仲尼曰(중니왈) 君子中庸(군자중용) 小人反中庸(소인반중용) 공자님이 말씀하시기를 ‘君子(군자)는 中庸(중용)이고 小人(소인)은 反中庸(반중용)이니라’라고 공자님이 말씀 하셨다>라고 있고 道敎(도교)의 道德經(도덕경) 上鞱光章(상도광장)에 <이러함으로써 성인은 그 몸을 뒤로 돌리면서 몸이 앞서고 그 몸을 벗어나면서 그 몸이 있다. 그리하여 내가 그렇게 없이 여기기 때문에 능히 나를 이룬다. 是以聖人(시이성인) 後其身而身先(후기신이신선) 外其身而身存(외기신이신존) 以其無私(이기무사) 故能成其私(고능성기사)>라고 있다. 그러한 입장들에서 동양적 大我(대아)의 本質(본질)과 現實(현실)과의 관계를 몇 가지 哲學的(철학적) 側面(측면)으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기로 한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이 세상에 나왔듯이 <나>는 내가 알거나 모르거나 항상 <나 아닌 것>에로 <되어 가면서 있다> 몸은 몸대로 항상 다른 마음으로 되어가면서 있다. 물론 여기서 달라진다는 말은 人格的(인격적) 同一性(동일성) 그 자체를 부정하는 말은 아니다. 몸의 成長老喪科程(성장노상과정)은 몸의 本質的(본질적) 變化(변화)내지 生成(생성)과정이고 마음의 무한한 慾望(욕망) 充足(충족)과정은 마음의 본질적 變化(변화)내지 발전과정이다.
  그러한 본질적 변화과정에 근거하여 ‘몸’에서는 성장과 老喪(노상)의 두 방향에서 大我(대아)와 小我(소아)가 생각되고 ‘마음’에서는 욕망과 충족의 두 방향에서 大我(대아)와 小我(소아)가 생각된다. 몸의 무한한 성장의 방향에서 不老不病長生不死(불로불병장생불사)가 大我(대아)의 本質(본질)이라고 생각되기도 하고 또 慾望(욕망)의 무한한 充足(충족)의 方向(방향)에서 모든 욕망이 완전하게 충족된 至樂無求(지락무구)의 상태가 대아의 본질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현재의 ‘몸’이나 ‘마음’은 항상 불만스럽고 바람직하지 못하고 불완전하고 괴로운 소아로 생각되면서 만족스럽고 완전하고 괴롭지 아니한 미래의 가능적 이상적 ‘나’를 대아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 경우에 소아는 의욕적 실존자이기도 하고 大我(대아)는 이념적 실재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적 소아를 항상 부정하면서 理念的(이념적) 대아에로 辨證的(변증적)으로 성장발전하고 있는 生成(생성)과정적 統一的(통일적) ‘나’를 대아라고 본다면 現實的(현실적) 小我(소아)도 대아일수 있고 理念的(이념적) 大我(대아)도 小我(소아)일수 있다. 이념적 대아는 항상 현실적 小我(소아)에서 이루어지면서 있고 또 현실적 小我(소아)는 항상 이념적 대아로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에는 대아는 다만 생성과 정적 ‘나’일 뿐이다. 그리한 生成過程的(생성과정적) 대아에서 볼 때에는 歷史的(역사적)으로는 대아는 항상 現存者(현존자)이지 旣滅者(기멸자)나 未生者(미생자)는 아니다. 달리 말하자면 어제의 ‘나’보다는 오늘의 ‘나’가 대아이고 내일의 ‘나’보다도 오늘의 ‘나’가 대아라는 말이다. 그렇게 파악된 생성 과정적 創造的(창조적) 辨證的(변증적) ‘나’가 곧 ‘永遠(영원)한 지금’에 사는 東洋的(동양적) 超越的(초월적) 대아인 梵我(범아)이기도 하고 佛菩薩(불보살)이기도 하고 또 道人(도인)․聖人(성인)․君子(군자)이기도 하다. ‘몸’은 감각적이고 직접적인 分別(분별)과 느낌을 본질적으로 하고 있고 ‘마음’은 논리적이고 간접적인 판단과 이해를 본질적으로 하고 있다. 몸이 몸인 까닭이 거기에 있고 마음이 마음인 까닭이 거기에 있다. 몸에 달린 눈이 보는 일과 마음이 생각하는 일은 몸과 마음이 서로 異質的(이질적)으로 다르다면 그렇게 다르듯이 그렇게 서로 다르다. 눈은 보지만 마음은 보지 못하고 마음은 생각하지만 눈은 생각하지 못한다. 생각을 못하는 눈은 현재의 形色(형색)만을 알고 과거와 미래의 形色(형색)을 모르고 눈이 없는 마음은 과거와 미래를 생각만 하여 알면서도 눈이 현재의 형색을 보듯이 알지는 못한다. 눈에 대한 과거와 미래의 形色(형색)은 思惟的(사유적)으로 未知(미지)이고 마음에 대한 과거와 미래의 形色(형색)은 감각적으로 미지이다. 눈은 現量(현량)이고 마음은 比量(비량)이기 때문이다. 눈은 항상 ‘나’의 ‘몸’의 現存(현존) 形色(형색)만은 보고 알면서도 그 과거와 미래의 形色(형색)을 알지 못한다. 마음은 항상 ‘나’의 ‘몸’의 과거와 미래의 形色(형색)을 생각만 하여서 알면서도 현재의 ‘나’의 ‘몸’의 형색을 눈이 보듯이 그렇게 직접 알지는 못한다.
  그것은 마치 눈이 눈을 볼 수 없고 光線(광선)이 光線(광선)을 비칠 수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런 뜻에서 눈 같은 現實的(현실적) 感覺(감각)은 <나>의 과거와 미래에 대하여 思惟的(사유적)으로는 無知(무지)이고, 마음은 즉 反省的(반성적) 思惟(사유)는 <나>의 과거와 미래에 대하여 감각적으로 無知(무지)이다. <내>가 <나>에 대하여 하는 인식은 그렇게 본질적으로 旣知(기지)와 未知(미지)내지 無知(무지)와의 兩面的(양면적) 방향이 있다. <나>에 대한 <나의 認識(인식)>의 그러한 本質的(본질적) 兩面性(양면성)에 근거하여 <몸>과 <마음>이 서로 모르는 그 無知(무지) 내지 未知(미지)의 방향에로의 <나>가 大我(대아)로 생각되기도 한다. 그런 상황에서 大我(대아)는 곧잘 自明的(자명적) 熟知(숙지)의 그 어떤 것으로 생각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不思誠(불사성) 不可知(불가지)의 未知的(미지적) 그 무엇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그래서 大我(대아)는 항상 알면서도 모르는 것 같고 모르면서도 아는 것 같은 그런 알쏭달쏭한 兩面性(양면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分析學(분석학)이나 哲學(철학)이나 心靈學(심령학)에서 취급하는 經驗學的(경험학적) 對象(대상)도 되고 또 形而上學(형이상학)이나 宗敎(종교)에서 취급하는 超越的(초월적) 信仰的(신앙적) 對象(대상)도 된다.
  이싸 우파니샤드(lsa upanisad)에 <그것(我(아) item)은 움직인다.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은 멀기도 하고 가깝기도 하다. 그것은 一切(일체)의 안에 있기도 하고 밖에 있기도 하다. 누구든지 이 세상 모든 것 안에서 본다면 그는 그렇기 때문에 의심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아트만과 하나가 되었음을 안 경지에서 그 하나(ekatva)만임을 안 사람에게는 알쏭달쏭하여 알 수 없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또 걱정스러운 것도 하나도 없다>(5․6․7)라고도 있는 동시에 께나 우파니샤드에서는 ‘거기에는 눈도 못가고 말도 못가고 마음도 못간다. 知(지)(vidma)로도 알 수가 없고 解(해)(vijasnima)로도 알 수가 없다. 어떻게 그것을 가르칠 수가 있으리요. 그는 알려진 것(vidira)과는 다른 것이고 알려지지 않은 것(avidita)보다는 위(上(상) adhi)의 것이다. 그는 言語(언어)에 의하여 표현될 수가 없으며, 言語(언어)가 그에 의하여 표현된다. 그는 意識(의식)(manas)에 의하여 意識(의식)될 수가 없고 意識(의식)이 그에 의하여 의식된다. 너는 그가 곧 브라흐만이라고 알아야 한다. 사람들이 보통 그것이라고 하는 그것이 아니다>(1․3․4․56)라고도 있다. 佛敎(불교)의 梵本般若八千頌不思義品(범본반약팔천송불사의품)(acintyaparivartah)에 <수보리야, 진실로, 如來性(여래성), 佛性(불성) 自存性(자존성), 一切(일체) 知性(지성)은 不可知(불가지)이다. Acintyam hi subhute tathagatatvam Buddhatvam svayamatvam sarvajnatvam>라고도 있고 元曉大師(원효대사)의 涅槃經宗要(열반경종요)의 첫머리에<본래 涅槃(열반)의 道(도)됨은 道(도)가 없으면서 道(도)가 아닌 것이 없고……지극히 멀기 때문에 그것을 가르쳐준 이후 千劫(천겁)이 지나면서도 거기에 이르지 못하고 또 지극히 가깝기 때문에 말(言(언))을 잊(忘(망))고 그것을 찾으면 一念(일념)을 지나지 않아서 스스로 만난다.(不過一念而自會也(불과일념이자회야))>라고도 있다. 道敎(도교)의 道德經(도덕경)의 첫머리에 있는 <道(도)를 可(가)히 道(도)라고 할진대, 그것은 當道(당도)가 아니요 名(명)을 可(가)히 名(명)이라 할진대 그것은 當名(당명)이 아니다>라는 말은 너무나도 有名(유명)하고도 알송달송한 말이다. 儒敎(유교)의 大學(대학) 經文(경문)의 첫머리에 있는 <大學(대학)의 道(도)는 明明德(명명덕)에 있으며 親民(친민)에 있으며 至善(지선)에 머무름에 있다>라는 말에서의<明明德(명명덕)>이라든가 <親民(친민)>이라든가 <至善(지선)>이라는 말들도 역시 너무나도 빤하게 잘 알고 있는 말들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매우 알기 힘든 말들이다.
  <몸>은 보고 싶고 먹고 싶고 듣고 싶어 한다. <몸>이 本質的(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官能的(관능적) 存在(존재)條件(조건)이다. <몸>을 <나>라고 생각하면서 <마음>은 <몸>의 관능적 존재조건을 충족시킴이 곧 <나>의 욕망의 충족이라고 생각한다. 이리하여 肉體(육체)의 慾望充足(욕망충족) 過程(과정)이 곧 <나>의 삶의 전부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데 <몸>의 관능적 존재조건을 충족시키려는 慾望(욕망)은 언제나 現實的(현실적)이고 감각적인데 그러한 現實的(현실적)이고 감각적인 慾望(욕망)을 <마음>은 <마음>이 가지는 本質的(본질적) 思惟的(사유적) 未來指向性(미래지향성)에 의하여 理想化(이상화)내지 理念化(이념화)할 때에 관능적 現實的(현실적) 肉欲(육욕)의 충족과 思惟的(사유적) 理想的(이상적) 理念(이념)의 實踐(실천)과의 사이에는 서로 反價値的(반가치적) 對立(대립)이 생기기도 한다. 가령 굶주린 몸은 당장에서 보이는 대로 쥐약이 묻은 빵이라도 먹고 싶지만 그러나 굶주린 현재보다도 미래의 죽음을 생각하는 마음은 먹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몸>을 <나>라고 생각하는 <마음>은 현재의 현실적 <몸>이 아닌 미래의 理想的(이상적) <몸>도 <나>라고 생각하는 나머지 미래의 理想的(이상적) 觀念的(관념적) <내 몸>과 현재의 現實的(현실적) <내 몸>과의 사이에서 慾望(욕망) 充足(충족)에 規範的(규범적) 생각을 일으킨다. 한 말로 하자면 <나>는 항상 한편으로는 하고 싶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나면서 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孔子(공자)님이 <志士仁人(지사인인)은 살기 위하여 仁(인)을 害(해)롭히는 일은 하지 않지만 仁(인)을 이루기 위하여 몸을 죽이는 일은 있다>(論語衛靈公章(논어위령공장))라고 말씀하신 것이라든가 또 孟子(맹자)님이 <내가 살고도 싶고 義(의)롭고도 싶지만 義(의)롭게 살지 못할 바에야 삶을 버리고 義(의)를 취하겠다>고 하신 말씀(孟子告子章上(맹자고자장상))도 그런 어떤 極限狀況(극한상황)에 근거한 말씀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그러한 規範的(규범적) 생각에서 욕망 충족의 先後(선후)와 輕重(경중)이 생기고 行動(행동)에 規範性(규범성)과 價値性(가치성)이 있게도 된다. 그리고 <마음>에 의하여 理念化(이념화)된 現實的(현실적)이고 감각적인 <몸>의 慾望(욕망)의 外延(외연)이 확대될 때에 自然科學的(자연과학적), 哲學的(철학적), 形而上學的(형이상학적), 宗敎的(종교적) 大我(대아)들도 생각되게 된다. <大我(대아)>라는 말이 때로는 種族的(종족적) <民族(민족)> 運命共同體(운명공동체)나 利益共同體的(이익공동체적) <國民(국민)> 思想的(사상적) <同志(동지)>라는 말들이나 또는 신앙적 대상을 뜻하는 어떤 말들과 同義語(동의어)로도 사용되는 까닭도 그런 데에 있다. 또 大我(대아)의 實現(실현)은 現實的(현실적) 小我(소아)의 부정적 방향인 것처럼 생각하기 쉬운 까닭도 거기에 있다. 그러나 小我(소아)의 부정이 곧 大我(대아)의 現實(현실)인 것처럼만 생각함은 마치 고양이가 자기의 꼬리를 남의 것인 줄로 잘못 알고 물어 뜯어버리려고 맴돌면서 애쓰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肉體的(육체적) 小我(소아)의 관능적 욕망은 理念的(이념적) 大我(대아) 現實(현실)의 기초이고 動力因(동력인)이다.
  <몸>이 <마음>에 의하여<내 몸>이라고 생각될 때 肉的(육적) 욕망은 정신적 理念(이념)의 실현의 動力因(동력인)이고 <몸>의 현재의 움직임은 미래의 理想的(이상적) <나>를 實現(실현)하는 가치있는 役事(역사)로 생각된다. 그때에 이상적 <나>는 물론 육체적 현실적 役事(역사)의 目的因(목적인)이다. 理想的(이상적) <나>를 실현하는 데에 있어서는 동력인과 목적인은 마치 <나>에서 <몸>과 <마음>이 不可分離(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듯이 그렇게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그러나 動力因(동력인)에 의하여 이상적인 目的因(목적인)의 방향에로의 役事(역사) 過程(과정)에서 현실적 동력인인 동시에 현존하는 관능적 욕망의 덩어리인 육체는 小我(소아)로 생각되고 이상적 목적인인 동시에 마음속에 있는 미래의 가능적 理念(이념)은 大我(대아)로 생각되기도 한다. 또 그와는 반대로 現存(현존)하는 動力因(동력인)인 육체를 創造的(창조적) 大我(대아)로 생각하고 마음속의 理念的(이념적) <나>를 그 육체적 창조적 동력적 大我(대아)가 자기를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觀念的(관념적) 設計圖(설계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고 그것을 小我(소아)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념적 <나>의 방향으로 대아가 생각될 때에는 <나>의 행동에서 倫理道德的(윤리도덕적) 規範性(규범성)이 강조되고 肉體的(육체적)인 <나>의 방향에로 大我(대아)가 생각될 때에는 자연히 창조성이 강조된다. 구태여 비교하여 말을 한다면 전자의 경우는 儒敎(유교)의 聖人君子的(성인군자적) 大我(대아)라고 할 수가 있고, 후자의 경우는 道敎(도교)의 道人的(도인적) 대아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런 두 가지 경우를 부정적으로 아울러 가지는 경우는 印度敎(인도교)의 梵我的(범아적) 大我(대아)라고 할 수가 있고 또 그런 두 가지 경우는 긍정적으로 아울러 가지는 경우는 佛敎(불교)의 佛菩薩的(불보살적) 大我(대아)라고 할 수도 있다.
  이상과 같은 동양적 대아의 본질과 현실과의 관계에서 볼 때 그야말로 말 그대로의 오늘날 우리 韓國的(한국적) 現實(현실)에서 하나 하나 한국 사람으로서의 <나>들이 과연 어떤 類望(유망)의 大我(대아)를 <나>의 대아로 삼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보람 있게 행동을 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그 누구에게도 本質的(본질적)으로 있다. 또 대다수의 우리는 이미 그 어느 하나의 大我(대아)에로 이미 살고 있다. 그들은 마치 <나>에서 본질적으로 <몸>과 <마음>이 對立(대립)내지 矛盾(모순)되는 듯하면서도 서로 협동하면서 <나>라는 하나가 성장 발전하듯이 서로 다른 大我觀(대아관)에서 대립 내지 모순되는 듯하면서도 서로 協同(협동)하여 韓國(한국)이라는 하나의 大我(대아)를 마치 하나의 <나>처럼 훌륭하게 성장 발전시킬 수가 있다.

  金剛經法會因山第一(금강경법회인산제일)의 治父頌(치부송)에는
<알 수 없는 나 (我(아))여
알고 보면 둘이 되는 나여>
(我淨裸裸赤酒酒沒可把(아정나나적쇄쇄몰가파) 我認得分明成兩箇(아인득분명성양개))라고 있고 또 得通設誼(득통설의)에는
<眞(진)이 佛(불)이냐 身(신)이 佛(불)이냐
한 몸이 두 故鄕(고향)을 그리는 마음이로다>
(佛本源天眞是相好嚴身是一身分作兩鄕心(불본원천진시목호엄신시일신분작양향심))라고 있다.
與野(여야)도 그 <나>와 그 <몸>과 그 <마음>을 살아야 나라도 흥할 것이고 勞資(노자)도 그를 살아야 世界(세계)도 흥할 것이다. 師弟間(사제간)에도 그를 살아야 勉學(면학)과 硏究(연구)는 제대로 될 것이다.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