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디에도 없지만 어느 곳에나 있다.' 2017년 이 문장은 신의 전능성에 대한 문구가 아닌 불법도촬 카메라의 만연함을 일컫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몰카라는 용어는 엔터테인먼트 콘텐츠의 일환으로 퍼지기 시작했기에, 이것을 치기어린 개인의 놀이나 악의 없는 장난, 또는 한 사람의 진실이나 선의를 드러내기 위한 극화된 장치 등의 의미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하기에 이 용어는 여성혐오범죄로서의 사이버 폭력의 현실을 은폐하는 언어로 기능하는 측면이 크다. 그러하기에 다른 용어로의 전환은 인식전환의 관점에서 반드시 필요하며, 바로 이러
한 대학교수가 1학년 필수 교양 수업에서 “엄마는 자궁을 가진 존재로 자식을 낳는 존재지 자식을 죽이는 존재가 아니다” “아빠가 때리는 거를 자기 혼자 다 맞아서 피투성이가 되더라도 아이들을 살리는 게 엄마다”라며 가정폭력에 시달리다가 자녀 셋과 함께 자살한 여성을 모욕했다. 해당 수업의 녹취록이 공개돼 한동안 파문이 있었는데, 나는 강의 내용 중 교수가 농담이랍시고 “사실은 엄마라면 자기가 보험을 여러 개 들어놓는 거 에요, 그러고 그냥 죽는 거에 넘어가요”라고 던진 말에 학생들이 웃는 소리가 가장 서늘하게 들렸다. 가정 폭력으로
 ̄터널이 있어요. 강이 있어요. 다리가 있어요. 언덕이 있어요. 계단이 있어요. 지붕이 있어요. 길이 있어요. 벽이 있어요.겨울이 지나가요. 눈보라가 지나가요. 봄이 지나가요. 여름이 지나가요. 노을이 지나가요. 비가 지나가요. 안개가 지나가요. 가을이 가요.얼음이 있어요. 모래가 있어요. 호수가 있어요. 바다가 있어요. 물고기가 있어요. 배가 있어요. 파도가 일어요. 파도소리가 들려요.구름이 지나가요. 두시가 지났어요. 세시가 지났어요. 일곱시가 지났어요. 여덟시가 지났어요, 열두시가 넘었어요. 달빛이 지나가요.가시가 있어요. 가
지난 4월 28일부터 열흘간,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극단 ‘백수광부’의 이 무대에 올랐다. 은 안톤 체호프의 4대 장막극 중에서도 높은 완성도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원작이 쓸쓸하고 애잔한 정서를 강조하는 반면, 극단 백수광부는 ‘꿈’을 매개로 하여 을 몽환적인 느낌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연극 은 빛과 그림자를 이용해서 꿈을 꾸는 듯한 몽롱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 중에서도 주인공 라네프스카야가 아끼는 벚꽃동산은 꿈과 현실을 매개하는 소재로서 환상적으로 그려진다. 그녀는 부유했던 집안
대개 ‘혁명’이 그렇듯, ‘페미니즘 리부트’ 또한 대대적인 ‘계몽’의 장을 열어젖혔다. ‘성인지(性認知)’와 ‘성인지(成人誌)’를 구분 못하는 남성들에게만 그랬다는 게 아니다. 두드러지게 확장된 페미니즘 도서시장, 매번 만석이라는 각종 페미니즘 학술행사,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온·오프라인의 페미니즘 독서모임 등은 ‘페미니즘 리부트’가 유례없는 ‘여성지성의 향상 및 (재)활성화 프로젝트’이기도 하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이는 물론 남성의 수준을 상회한다는 20~30대 여성들의 높은 고등교육률 및 학업성취도와 관련 있다. ‘양성평등’을
나무 위로 고양이가 올라가고 내려가지 못하는 사이 목련이 피었다 저기 나무가 있었나 없었나 그래도 목련이 피었다 辛夷와 北向花 사이로 보이는 목련이 피었다 목련을 좋아하고 싫어하고 목련이 피었다 지겹다 아프다 힘들다 목련이 피었다 먼지가 많고 밤에는 비가 내릴 예정입니다 목련이 피었다 미안해 고마워요 잘 지냈지 잘 지내요 목련이 피었다 지금 몇 시지 그게 언제지 목련이 피었다 도망치고 싶어서 목련이 피었다 목련이 피었다 소파가 있는 이 층 창밖으로 보이는 그 목련이다 저기 목련이 피었네 저리 한 번 가보자 하고 가서 주저주저하다 두
이름의 힘은 강렬하다. 이름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다면 인간은 조금 더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이름은 단지 누군가가 부르기 쉽도록 붙인 명사가 아니다. 존재하기 위한 명제다. 그 명제를 고민하고 연구하는 일이 어쩌면 삶일지도 모른다. 는 한 흑인아이가 소년이 되고 청년이 될 때까지의 과정을 보여준다. 아이의 이름은 리틀이었고 샤이론이었으며, 블랙이다. 리틀과 샤이론은 누군가에 의해 선택된 이름이며 블랙은 스스로 불리길 원하는 이름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름은 정체성과 무관하지 않다. 영화는 세 챕터로 되어 있다.
나와 동생이 어느 정도 커서 각자의 방을 요구하게 되기 전까지 우리 집에는 아버지의 서재가 있었다. 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그 방을 자주 들락거렸는데, 아버지의 책을 읽기 위해서는 물론 아니었고 책장을 기어오르기 위해서였다. 한 쪽 벽을 모두 가리는 원목 책장은 그 당시 어디든지 기어오르는데 재미를 붙인 내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놀이기구였다. 기껏해야 너, 댓살 밖에 되지 않았던 나는 겁 없이 책장의 칸칸을 딛고 높이, 높이 올랐다. 그런 나를 발견한 아버지가 깜짝 놀라 나를 다시 바닥에 내려놓을 때까지.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이상하다’라는 말은 이상하다. 간혹 이해불가능한 상황들의 편리한 근거가 되곤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하는 이상함은 비현실적인 것에서 출발한다. 비현실적인 사건, 비현실적인 인간, 비현실적인 풍경. 하지만 가끔 현실이 비현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현실적인 것과는 다른 위화감, 그것은 우리가 평소 느끼지 못한 일상이라는 균열의 흔적이다. 반대로 비현실적인 것에서 현실을 발견할 때도 있다. 거울처럼 서로를 비추고 있다고 하기에는 식상하고, 우리는 그 갈라진 균열의 무늬를 멀거니 바라보곤 한다. 왜냐하면 그곳은 광활한 상상력이 펼쳐지는
아카이브(archive)의 영역에 제한이 없어진 지는 오래다. 패션, 스포츠, 게임 등 떠올릴 수 있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는 아카이빙 의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클릭 몇 번이면 된다. 이러한 지금, ‘훼손된 아카이브’에 대해 생각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백승우의 작품은 눈에 띈다. 백승우의 최근 작품들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전시되어 있다. 展에는 현재 백승우를 비롯한 네 팀의 작품이 관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매년 우리나라 미술계에서 독창성을 발휘한다고 평가되는 작가 들이 선발되어 ‘올해의 작가상’을 두고
간직한 것인가 쌓인 것인가 서운한 표정이 서글픈 표정을 기억하고 웃는 얼굴이 미소 짓는 얼굴을 뒤따른다 굳은살이 박인 너의 혀다섯 군데나 테이핑을 한 작은 손나는 모른다 닫았니 다쳤니 우리 그냥 사이좋게 지내자안장(鞍裝)에 앉아있는 것처럼 원래보다 더 편리하게 달아야 하는 단추를 잘 간수할수록 꼭 잃어버리게 되는 건 왜일까용접기술사가 땜질을 하고 있는 그 부분을 보고 돌아와 큰 서랍에 두 손을 넣어 보았다 누구의 것이었을까 커다란 귀만 만져졌다 찢어졌나봐 아직도 갖고 있는 누군가의 귀 서랍에 넣거나 비우거나 나는 내가 버린 뾰족한
어머니는 나를 뱄을 때 책을 읽지 않았다. 그녀는 영천의 돼지 농장에서 셰퍼드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는 집에 거의 오지 않았고 어머니는 농장을 거닐며 아이가 제발 아버지 같은 인간이 되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대청마루에 앉아서는 흙먼지가 날리는 마당을 보며 올드팝을 들었다. 그녀가 들었던 노래는 달리다의 나 앤디 윌리엄스의 노래를 들었고 나는 초등학교 때 그 노래들을 들었다. 어머니는 노래들에 대해 가타부타 설명하지 않았고 점점 듣지 않게 된다고만 하셨다. 그녀는 일을 했다. 아버지는 음악을
현재라는 시간은 물리적으로는 모두에게 동일하게 다가올지 모르나 감각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이 시간은 어떤 이에게는 과거의 연장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바쁘게 살아가는 지금을 의미한다. 이처럼 우리는 각자의 감각으로 현재를 인식하고 있다. 영화 에서도 이렇듯 상이한 현재에 대한 인식을 포착할 수 있다. 은 개봉 전부터 입소문을 탄 영화였다. 그 이유는 유명 배우들이 출연하여 화제성을 얻었다는 점과 영화의 내용이 이와 유사한 ‘어떤 사건’을 상기시키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 영화의 중심서사는 정수(하정우 역)라는 인
땅 밑을 생각해야 했을 때지하도가 넓어지고 깊어지는 만큼사후 세계도 그만큼 더 내려가 건설되어야 했을 때 내가 지옥을 생각해야 했을 때지옥은 땅 위에 있다는 말이 농담이었을 때지상의 농담에는 진리의 빛이 비유적으로 한 줄기,사실로는 적어도 세 줄기 이상 비추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위력을 얻었을 때아치가 무너지고무너진 아치가 지옥을 드러내었을 때 모르는 사람이 죽었을 때그가 먼저 지옥을 보고 돌아와그곳의 풍경을 말해주지 않았을 때 연막 속에서 웃음이 시작되었을 때어떤 입체도 불가능하다고 느꼈을 때어느
과천에 위치한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현재 과천 30년 특별전 가 전시 중이다. 올해 과천 이전 30년을 맞이하여 기획한 특별전으로 300여명 작가들의 소장품을 중심으로 신작 560여점이 전시된다. 또한 작품이 탄생하는 시대적 배경-제각-유통-소장-활용-보존-소멸-재탄생의 생명 주기와 작품의 운명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고찰한다. 이번 전시의 가장 큰 장점은 공간의 활용도에 있다. 각 층마다 서로 다른 테마로 구성된 전시는 1층 ‘풍요의 바다’, 2층 ‘맑음의 바다’, 3층 ‘고요의 바다’로 꾸며져 있다. 각 전
오랫동안 내가 사랑해온 작가는 신경숙이다. 나는 대학에 가서야 『외딴방』(1995)을 읽었는데 지금과 달리 분권이 되어있던 그 책을 붙들고 느꼈던 감동과 슬픔, 소설이라는 것에 대한 환기를 잊지 못한다. 그 책은 소설을 쓴다는 것에 대해 어느 방향을 지시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닿는 곳은 마음, 내 자신의 마음에 있었다. 그래서 그 소설은 당연히 이런 문장들로 시작한다. 이 글은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의 글이 될 것 같은 예감이다. 하지만 그걸 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지. 글쓰기를 생각해본다. 내게 글쓰기란 무엇인가? 하고.
난간에 다가갈 때마다은밀한 생각이 따라온다 잠시 완전범죄를 꿈꾸는 일 삶의 질문들은 늘 차고 미끄러지기 쉬웠으므로누군가 난간에 묵직한 화분들을 두었겠지만 아득한 저 아래가 혹 가물거리는 천국 아닌지요? 꿈속에서입만 벌리고 부르는 노래가 그러할까 믿었던 것들은 닿지 않거나 사라지거나나는 아무 것도 몰라요,우리는 모두 투명인간처럼 한 사람이 창을 넘어갔는데 아무도 못 보았다 했다 이렇게 텅 빌 수 있다니이렇게 완전할 수 있다니 우리가 매혹되는 일에 대해 세계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때때로 내 몸도 창 없는 난간을 넘으려 한다 투명하게 정
‘슬픈’ 대학원생이 자신이 겪고 있는 부당함에 대해 발설하기란 쉽지 않다. 한 대학의 대학원이라는 좁은 사회에서 동료, 선배, 교수 등에 대한 부당함의 발설, 폭로는 자칫 말한 이를 내부고발자로 낙인찍어 소외시키는 악순환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자의 반 타의 반 숨을 죽이며 삶을 영위하는 ‘슬픈’ 대학원생들에게, 고려대학교 일반대학원 총학생회에서 주관한 연재 웹툰 은 하나의 장(場)을 열어주었다. 대학원생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사연을 익명으로 제보하여 웹툰의 형태로 이를 모두와 공유할 수 있게 된
홍대 KT&G 상상마당에서 거장 시리즈의 세 번째인 ‘장 자끄 상뻬-파리에서 뉴욕까지’가 전시 중이다. 장 자끄 상뻬는 『좀머씨 이야기』, 『꼬마 니콜라』의 삽화가로 국내에서도 높은 인지도를 가진 프랑스 출신의 일러스트레이터이다. 국내에 소개된 그의 작품들과 상뻬 특유의 아기자기한 그림체 때문에 그에 대해서는 ‘소박하고 일상을 잘 담아내는 작가’라는 인식이 강하다. 이번 전시는 총 다섯 개의 주제로 나누어져 있는데 주제별로 전에 볼 수 없던 상뻬의 다양한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상뻬의 그림을 보고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단순하다
주중에는 일하고 주말에는 글 쓰는 생활을 한 지 3년 반이 흘렀다. 책 읽는 시간은 예전보다 현저히 줄어들었다. 책 욕심이 많아서 신간이 나오면 무턱대고 사기 일쑤지만 표지도 못 열어보고 지나치는 책들도 꽤 생겼다. 어느 날엔가는 대청소를 하다 인터넷 서점에서 배송된 상자를 발견하기도 했다. 심지어 지난 계절에 주문했던 책들이었다. 그 뒤로 어떻게든 책과 멀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틈나면 책을 읽던 내가 어느 날부턴가 틈내서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을 애써 기다리지 않게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