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훈,『달력 뒤에 쓴 유서』, 민음사, 2023.

 
 
 △ 사진 = YES24
     

   게오르그 루카치의 그 유명한 서두,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라는 문장이 암시하는 것 중 하나는, 소설이 ‘길 찾기’와 모종의 관련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문제는 더욱 심화되어 다른 틀로 형식화되는 것 같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포스트모던적 공간의 특징을 “인식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지도 그릴 수 있는 능력을 초월*”했다는 것으로 정식화했다. 즉 근대의 문제가 ‘내가 지금 있는 곳과 나의 관계를 잃었다’라는 것이라면, 포스트모던의 문제는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소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직관 중 하나는, 좋은 소설이라면 반드시 나름의 방식으로 이 위치성 내지는 공간성의 문제를 탐구한다는 것이다. 최근 출간된 소설가 민병훈의 자전적 소설 『달력 뒤에 쓴 유서』 역시 마찬가지이다. 내용상 이 소설은 아버지의 죽음을 둘러싼 일들을 소설로 쓰기 위해 아버지가 죽은 곳이자 자신의 고향이었던 속리산 중턱의 작은 마을에 간 화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에는 미스터리하다고 할 법한 부분이 거의 없다. 또한 막상 속리산에 간 화자는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런 방식으로, 이런 간단함으로,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이곳에 온 걸까.” (14쪽) 이때 화자가 거부하는 간단함이란 기계적 인과성에 의해 설명되는 사실들이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찾으러 속리산으로 가는 것일까? 내가 생각하기에 그가 찾고자 하는 것은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발생한 공간 자체이다. 그런데 이 공간의 특징은 사건이 발생한 즉시 사라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죽은 안방은 “현장”(14쪽)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공간성에 편입되고, 그의 사인은 “장기에 흡수된 어떤 액체와 그 영향”(15쪽)으로 환원된다. 그러나 이로부터 화자는 끊임없는 이질감을 느끼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기술이 그가 경험했던 현실과 어긋나 있었기 때문이다. 현장은 어디에나 있을 수 있으며 똑같은 사인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 하지만 화자에게 그 사건은 바로 그곳에서, 속리산이라는 공간에서 일어난 일이었으며, 위와 같은 보편적 설명은 그 사건이 이 공간과 갖는 관계를 전혀 말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괴리 속에서 사라지는 것은 화자가 경험한 현실 그 자체다. 그러므로 그의 문제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단순히 배경으로 환원되지 않는 공간, 혹은 기계적 인과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현실이라는 것이 있는가?

   난 거기 싫었어. 네 아빠가 왜 거기에서 살자고 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연고가 있던 것도 아니고, 아는 사람도 없었어. 같이 배 타던 사람이랑 한 번 왔대. 산, 산에 올라갔다고 했나. 거기에서 시작된 거야. 모두 집에 없을 때, 가만히 산맥을 바라보면 이상하게 어떤 날은 소름도 끼치고, 기분이 확 가라앉았어. 네 아빠랑 시간이 갈수록 싸웠지. 거기 살면서 좀 변한 거 같아. (54쪽) 

   민병훈은 인간을 휘두르고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인간과 관계하는 공간의 힘을 가장 민감하게 느껴온 작가다. 많은 경우 공간의 깊이는 서사에 의해 형성된다. 말하자면 그것은 역사성에 의해, 혹은 소설 내부의 형식적 역학에 의해 부여된다. 하지만 민병훈이 찾는 것은 어쩌면 서사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사로 다 해명될 수 없는 공간성이며, 더 나아가 그것은 서사를 가능하게 하는 원인으로서의 공간, 모든 것이 “거기에서 시작된 거”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러한 원인으로서의 공간에 가깝다. 이 원인은 끝끝내 설명되지 않기에 달력과 같은 공식적인 기록이 아니라 그것의 뒷면에 적힐 수밖에 없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어떤 상처가 기록되기 위해 반드시 소설이라는 형식을 필요로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달력 뒤에 쓴 유서』는 바로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다.

*프레드릭 제임슨,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 문화 논리』, 임경규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2, 1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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