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에서 온 그대의 한 장면을 보면 팬이 선물해준 거대 곰인형의 눈에 불법촬영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주인공이 충격을 받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는 그것이 팬이 준 선물이어서도, 자신이 몰래카메라로 찍히고 있다는 사실이어서 놀란 것도 아니라 바로 ‘곰인형’에서 ‘불법촬영장치’가 나왔기 때문에 놀랐다.

  곰인형은 예로부터 안심의 메타포로서 사용되며 아이들의 침대에 위치하며 부재한 어른 보호자를 대신하거나, 무서운 악몽에서 깨어났을 때 꼭 껴안으며 물리적으로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어떤 장치로서 사용되었다. 소위 애착인형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이 침대 곁 인형들은 신기하게도 늘 폭신폭신한 ‘곰인형’이라는 형태로 존재해왔었다. 가장 내밀하게 나를 지켜주는 이 인형이 사실은 불법촬영의 도구였다니! 단순한 배신이 아닌, 가장 친근하고 부드러웠던 존재의 배신은 그에게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 혼자 산다>는 이러한 기존의 틀에 스며들며, 윌슨이라는 거대 곰인형의 눈에 카메라 렌즈를 장착하여 촬영하며, 이를 통해 부드러운 관음을 완성한다.

  출연진은 자신이 혼자 사는 삶을 공개하며, 집 안의 수많은 카메라들에 어색해 하며 뒷걸음질쳐 윌슨을 껴안는다. 이때 껴안겨 있는 커다랗고 하얀 윌슨은 단순히 카메라라는 물리적인 외형을 제거한 초소형 카메라로서 안심을 제공하는 것이 아닌, 메타포로서의 곰인형을 전유하며 더욱 내밀한 삶, 더욱 친근하고 날것에 가까운 출연진의 삶을 훔쳐보는 도구로서 사용된다. 이를 통해 촬영된 영상에서는 출연진이 윌슨에 뽀뽀를 하거나 기대어 눕는 모습을 보이며 카메라가 아닌 오로지 곰인형으로서만 인식하고 있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또는 아예 윌슨의 존재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익숙하게 거실에 뉘여 있는 인형 중 하나로서 비인식하고 있기도 하다. 즉 윌슨은 아주 부드럽고 익숙한 인형이나, 실상은 보이지 않는 수많은 타인의 관음에 연결되어 있는 통로인 것이다. 따라서 출연진은 윌슨이 촬영장치임을 인식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곰인형을 대하듯 만지고, 애정 어린 행동을 하게 된다. 누구를 향해? 관음하는 다수의 얼굴 없는 타인들을 향해.

  이 부드러운 관음은 보여지는 삶을 일상에 자연스럽게 위치하게 한다. 삶의 가장 말랑말랑한 부분까지 당연스럽게 보여지도록 연출하게 한다. 화장실, 지하철, 길거리의 불법촬영에 바싹 곤두서 있던 신경을 내려놓을 수 있던 집 안, 혼자 있는 집 안이라는 공간 자체를 사라지게 한다.

  그렇게 평범한 1인 가구의 일상은 언제든지 촬영될 수 있는 것이 된다. 실제로 촬영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방 안에 위치한 곰인형이라는 메타포가 카메라 렌즈로 전유되어버린 이상 관음은 보들보들하고 따끈따끈한 메타포가 되어 삶에 위치하게 된다. 즉, 나 혼자 사는 것을 보는 삶이 일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애초의 질문은 이렇게 시작되었어야 한다. 우리는 왜 타인이 혼자 집에 있는 것을 곰인형의 눈을 통해 보고자 하는가? 카메라 앞의 모습은 어색하니까?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네모낳고 커다란 방송용 카메라 앞의 개인은 왜 어색한가? 이는 바로 카메라 너머의 관음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보여짐’을 알고, ‘보여지’는 자신을 연기하기에 어색해진다. 연기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삶을 ‘보고’ 싶어 하는 타인들은 이미 확립되어 있는 메타포를 빼앗는 것을 서슴치 않는다. 자연스러운 삶이란 본디 무명의 타인들에게 보여 지지 않는 삶이다. 내가 타인을 보고, 타인이 나를 볼 수 있는 거리의 안전한 삶, 그 삶에 익숙해져야 한다. 내가 타인을 보고, 타인이 나를 볼 수 있는 거리의 안전한 삶, 그 삶에 익숙해져야 한다. 보들보들한 관음은 위험하다. 나 혼자 사는 것은, ‘보는’ 것이 아니라 ‘사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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