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동반자로서 고전

 
 
  △ 사진출처 : pixabay  

   강연을 하다 보면 마지막에 자주 접하는 질문이 있다. “강연을 듣고 더 많이 알고 싶어졌는데, 어떤 책을 읽으면 좋을까요?” 강연의 주제에 따라서는 특정한 책을 소개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이렇게 나는 대답한다. “아무 책이나 읽으셔도 상관없습니다. 두루두루 많이 읽으시면 좋습니다. 그러다 보면, 자기 취향과 고민에 어울리는 책을 발견하실 수 있습니다. 그 책을 꾸준하게 읽으시기 바랍니다.”

   내 자신을 돌아봐도 그랬던 것 같다. 책을 펼쳤다가 끝을 보지 못한 책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러나 마침내 나를 사로잡은 소수의 책들이 내 곁에 남았고, 그런 책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 같다. 나의 독서의 이력, 독서의 역사가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 가장 유력한 하나라는 뜻이다. 초등학교 시절, 선친께서 사주셨던 위인전 100권, 추리소설 시리즈 50권을 수차례 반복하며 읽었다.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관해 그때 접한 위인들의 몇 장면은 여전히 생생하며, 홈스처럼 작은 단서를 잡고 놀라운 추리력으로 사건을 해결해내거나, 괴도 루팡처럼 ‘위대한 범죄’를 완성하는 장면들도 나의 삶의 태도와 어떤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책들은 내 곁을 떠나고 이젠 없다. 내 곁을 지키고 있는 책들의 대부분은 대학 시절부터 읽었던 것들이다.

   대학에 입학하여 친구들과 함께 일주일에 한 권씩 책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을 가졌었는데, 그 가운데 특히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은 대학 시절 내내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맘에 드는 친구에게 그 책을 빌려주고 다 읽은 것을 확인한 후에는 만나 끝장 토론을 벌이는 일은 나의 일상 속에서 흥미로운 취미가 되었다. 남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 일은 정말 그를 위해 좋은 일이 될 수 있을까?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내 자신만 잘 추슬러도 훌륭한 삶이 아닐까? 소설 속에서 찾아낼 수 있는 문제들을 만들어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내가 그와 많은 점에서 섞이게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대학 선배들이 권장한 도서들 가운데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강의를 듣던 중 선생님들의 추천으로 읽게 되었던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스넬의 『정신의 발견』, 옹의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등은 지금도 내가 여전히 참조하며 나의 세계관과 인식론을 다듬어 나가는 데에 길잡이가 되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것,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가 있을까? 설령 그것이 있다고 해도 어떻게 해야 내가 그것을 알 수 있을까? 그런 것에 집착하는 것은 인식론적인 오류는 아닐까? 오히려 내게 유효한 지식과 정보는, 철학이나 역사, 인문학적인 영역에서의 담론뿐만 아니라 과학의 영역에서도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지금 여기’의 사람들 사이에서 합의된 의견이 아닐까? 설령 그것이 나중에 틀린 것이었음이 밝혀진다고 해도 지금 나로서는 어쩔 수 없이 진리라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닌가? 꾸준히 질문을 던지며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친구와 같은 책들이다. 내 인생의 동반자들.

   그리고 대학을 다니며, 그리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지금까지 만난 일련의 책들이 지금의 나를, 서양고전학자로 살아가는 나를 만들었다. 대학교 2학년, ‘서양고중세철학사’ 강의를 통해 상세하게 접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결정적인 책이었다. ‘진노를 노래하라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파괴적인 진노를...’로 시작하는 이 책은 순간 압도적인 매력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그렇다고 내가 그 책을 단숨에 읽었던 건 아니다. 그 이후에 쏟아져 나오는 낯선 고유명사의 영웅들과 신들이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지 않았고, 이야기의 진행은 지루했으며 번역의 문체는 고루했던 탓에 책을 잡았다가는 놓고, 또 잡았다가는 졸고를 반복,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일독을 했다.

   그런데 짙은 지루함을 유발하는 숱한 시구들 가운데서 찬란하게 반짝이는 몇 구절이 나로 하여금 그 책을 계속적으로 다시 잡게 했다. 지루한 진행 가운데서도 아킬레우스의 모습은 서서히 또렷해졌고 마침내 강렬하게 폭발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 그럼에도 그 존재를 지속시키려는 인간의 열망은 영원을 향하여 치솟는다. 마치 땅에 뿌리를 박고 있으면서도 지고한 하늘을 향해 상승하려고 꿋꿋이 자라나는 나무들과 같이, 땅을 딛고 살다 쓰러져 죽을 수밖에 없는 영웅들은 그렇게 불멸하는 영원한 명성을 향하여 아낌없이 목숨을 내던지고 있었다. 폭죽처럼 솟아올라 찬란하게 폭발한 후 산화되고 있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나의 삶은 『일리아스』를 읽으며 반응하는 ‘독서의 역사’로 설명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 책을 수차례 반복해서 읽고 있으며, 그리스어를 전공하게 된 이후로는 원어로 읽어가며 호메로스의 숨결에, 영웅들이 각축하던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 조금씩 더 다가가고 있다. ‘아킬레우스의 분노와 제우스의 뜻’이라는 제목으로 석사 학위 논문을 썼고, 그 이후 교내외 다양한 강연에서 나는 『일리아스』를 다양한 각도에서 다채로운 주제로 말하고, 여러 매체에 글을 써서 발표한다. 지금처럼. 그리고 내 삶에서도 그 문구들이, 그 주인공들이 직접 간접적으로 반영되었다. 내 삶의 환경이 변하면서 책을 읽고 이해하는 방식도 달라져갔고, 독서의 시각이나 해석의 방식이 달라지면서 나의 생각과 삶이 변하기도 했다. 그래서 감히, 어떤 면에서는 나의 삶이 『일리아스』를 읽는 나의 독서의 이력, 독서의 역사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책은 다양한 방식과 태도로 읽을 수 있다. 지루할 것 같은 시간을 흥미롭게 보낼 수 있는 여흥거리로 소비될 수도 있고, 그것은 그것대로 가치가 있다. 고전이라고 해서 별다를 것 없다. 난 어떤 고전들은 그런 식으로 읽곤 한다. 단순한 정보를 얻기 위해 일회성 독서를 할 수도 있고 발췌식 독서를 할 수도 있다. 그런데 두고두고 곁에 놓고 읽고 또 읽을 책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인생에 큰 축복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에게 동반자가 되어줄 수 있는 책이 하나쯤 있다면 인생은 훨씬 덜 외롭다. 바꿔 말한다면, 인생이 외로운 건, 어쩌면 곁에 두고 계속해서 읽을 수 있는, 읽고 싶어 하는 고전을 하나도 갖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인문학자라는 직업으로 살아가는 일은 매우 고단하고 불확실하다. 안정적인 직장을 갖는 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들뿐더러, 그 끝에 환한 길이 잘 보이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돌봐야 할 가정이 있는 경우에는 초조함과 자괴감이 순간순간 엄습하기도 한다. 그런 시절을 지내던 내게 힘이 되어 준 것도 『일리아스』였다. 그 책에 몰입하여 한 구절 한 구절 이해하려고 씨름하다 보면 어느새 시간을 휙 지내 보낸 뒤였다. 그렇게 『일리아스』는 나를 짓누르던 고민을 잊게 해주었고, 어떤 경우에는 나를 괴롭히는 고민에 직면하고 견뎌내며 이겨낼 수 있는 구체적인 힘을 주기도 했다. 치욕을 견뎌내며 기회를 노리는 아킬레우스가 될 수 있게 해주었고, 돌진해 오는 아킬레우스에 맞서 장렬하게 전사하는 헥토르가 되어 철저히 파괴되는 고통과 함께 묘한 희열을 느끼게도 해주었다. 그렇게 인고의 시간을 함께한 책이 내 곁에 있었기에 난 덜 외로웠고 더 강해진 것 같다.

   내게 『일리아스』가 있듯, 누군가의 곁에는 공자의 『논어』가 있고,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이 있을 것이다. 『어린왕자』나 『삼국지』를 읽으며 고독과 고통의 순간을 이겨내는 사람이 있고, 『성경』을 읽으며 불의에 맞서 의로운 길을 외롭게 걸어가면서도 힘을 얻는 사람도 있다. 고전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적어도 한 권쯤은 곁에 두고 외로울 때 소중한 친구를 만나듯이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읽을 것을 권한다. 그 책의 저자들이 힘들고 외로운 삶 속에서 깨달은 진실과 지혜를 거기에 새겨 넣었음을 생각해 보자. 그의 좌절과 고통, 그리고 삶에서 느낀 배신감과 억울함을, 그리고 그가 모색했던 희망과 용기를 생각해 보자. 그가 그곳에 하나의 인간(人)으로서 새겨 넣은 글의 무늬(文)를 내 가슴과 내 삶 속에도 새겨 넣는다면, 나는 그와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며, 그것으로 내 삶이 고전의 숭고한 가치를 뿜어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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