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재 촛불은 시민의 직접행동과 저항을 보여주는 상징물이 되었다. (사진출처 : shutterstock)  

한국에서 촛불집회의 역사는 제법 오래되었다. 언론에 기록으로 남은 것 중 가장 오래된 촛불집회는 1974년 9월 26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명동성당에서 주최한 기도회 겸 집회다. 당시 천주교 사제들과 신도들은 성모상 앞에서 기도를 올린 뒤 가두행진을 하며 민주헌정의 회복과 긴급조치 무효화를 주장했다. 대부분의 천주교 성당에서 성모상과 봉헌초는 함께 배치되어 있는데, 성모 마리아께 죄인들을 위하여 기도해줄 것을 바라며 신자 개개인의 간절한 소망과 염원을 담아 촛불과 함께 봉헌하기 위함이다. 수많은 시민들이 국가폭력에 의해 고통받던 민주주의의 암흑기, 우연하게도 종교적 이미지와 정치적 이미지가 중첩되면서 민주주의의 도래를 간절히 염원하는 이들의 기도가 촛불이라는 형태로 구체화된 셈이다.

   2000년대를 지나며 촛불집회는 보다 더 많은 대중들과 만나게 된다.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의해 여중생 2명이 압사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이에 대한 책임을 촉구하는 집회가 열렸고 이를 기점으로 촛불은 종교계가 주도하는 집회의 상징물에서 보다 폭넓은 대중들의 저항을 상징하는 상징물로 의미가 확장되었다. 그리고 2008년 한미FTA에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리면서 촛불은 명실상부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정부의 독단과 부조리에 대항하여 민주주의를 대변하는 상징물로서 자리 잡게 된다. 그 이후로 한국에서 촛불은 저항하는 자의 얼굴로 자리 잡았다. 2011년 반값등록금을 위한 대학생들의 집회에서, 2014년 세월호 추모집회에서 촛불집회는 부조리에 의해 고통받는 자들과 함께 울고 분노하며 저항의 불씨들이 모아 온기와 빛을 나누는 과정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저항을 거치며 촛불은 일반의지의 상징으로까지 부상하게 되었다. 100만 명이라는 사상 초유의 집회규모와 맞물려 촛불은 이제 정치적 입장과 계층적 지위를 막론하고 수많은 시민대중들의 직접행동과 저항을 보여주는 상징물이 된 것이다. 처음에는 박근혜 정권에 반대하던 사회운동세력과 진보적 시민대중으로 시작했던 촛불집회는 점차 박근혜 정권의 부패와 무능함에 실망한 보수적 시민대중까지 아우르며 부패한 권력에 대한 ‘주권자 국민’의 저항의지가 되었다. 촛불은 이제 민중의 얼굴, 국민의 얼굴이 된 것이다.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소위 ‘촛불혁명’)는 그런 의미에서 라클라우(E. Laclau)와 무페(C. Mouffe)가 말했던 포퓰리즘의 한 사례다. 혹자는 포퓰리즘이라는 말에 의문을 표할지도 모른다. 많은 이들에게, 특히 ‘망국적 포퓰리즘’이라는 말로 복지공약을 비판하는 정치 세력들에게 있어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어떤 병적인 폐단을 의미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클라우와 무페에게 있어 포퓰리즘은 단순히 무책임한 대중추수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민주주의의 구성적 요소다.

   민주주의 정치체계가 실제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선거, 다수결에 의한 법률안 결정, 정책적 우선순위에 따른 정책 집행 등 서로 다른 대중들 중 일부의 정치적 의지는 실현하고 일부의 정치적 의지는 억압해야 한다. 이때 억압된 대중들의 정치적 의지는 분출될 계기들을 요구하는데 이것이 바로 포퓰리즘의 원동력이다. 포퓰리즘은 억압된 대중들의 상이한 정치적 의지들을 연결하고 하나의 담론으로 표상함으로써 결국에는 억압된 자신들의 정치적 의지야말로 진정한 모두의 의지(국민 전체의 뜻, 전 민중의 의지)임을 내세워 권력을 얻는 정치다. 포퓰리즘은 그래서 선거처럼 민주주의의 제도화된 계기들을 통해 등장하기도 하고, 박근혜 정부의 사례와 같이 대중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정책을 운영하는 정권에 맞선 시민직접행동을 통해 등장하기도 한다.

   라클라우와 무페는 포퓰리즘적 전략이 가능한 조건을 논하는데 ①기존의 체제나 합의가 위협받는 인터레그넘(interregnum) 상황 ②권력을 가진 ‘저들’과 그에 억압당하고 있는 ‘우리’의 경계를 구성하는 담론과 등가연쇄 ③정서적 동일시가 이뤄지는 지도자의 존재가 바로 그것이다.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는 이와 같은 포퓰리즘의 조건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박근혜 정권에 대한 지지와 사회적 합의에 큰 균열이 가면서 인터레그넘 상황이 발생했고, 권력을 가진 저들 일부 보수정치세력(친박 세력)과 억압당하고 있는 우리 다수 시민들의 대비가 뚜렷했다. 마지막으로 대중들에게는 적폐 청산을 내세운 야당의 지도자이자 18대 대선 당시 박근혜의 강력한 대항마였던 문재인이 있었다. 특히 ‘보통사람’ 노무현에 대한 향수가 남아있던 시민들에게는 그의 정치적 동지이자 벗이었던 문재인의 재기라는 드라마가 더더욱 극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의 포퓰리즘적 열기는 문재인 대통령의 탄생으로 귀결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얼굴이 국민의 얼굴이자 촛불의 귀결이 된 셈이다.

   문제는, 문재인 정권의 행보가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로 형성된 포퓰리즘적 시민동맹에 균열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시민 대다수가 문재인을 뽑은 이유는 그가 적폐 청산의 적임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후에도 개헌이 무산되고 검찰개혁이 지지부진하면서 대북정책을 제외하고는 무엇 하나 시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개혁이라고는 없었다. 오히려 (노동)소득주도성장 기조의 사실상 폐기, ILO협약 비준을 위한 노동법 개정에 따른 갈등, 톨게이트 수납원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방관 등을 거치며 문재인 정권은 노동계와 갈라섰고, 특히 조국을 법무부 장관에 임명시키는 과정에서 불거진 일련의 논란은 청년과 소수자들로 하여금 개혁정권에 대한 기대를 접게 만들었다.

   이처럼 촛불 이후 오늘날 우리가 서 있는 한국 민주주의의 현주소는 포퓰리즘적 열기가 가라앉으면서 촛불집회로 봉합되어 있던 시민들 사이의 균열과 적대가 다시금 전면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지점이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촛불을 들었지만, 문재인 정권이 곧 자신의 민주주의일 수는 없었던 시민들이 제각기 분열된 것이다. 그리하여 조국 수호를 위한 서초동 촛불집회는 하나의 징후가 되고 말았다. 서초동 촛불집회에는 많은 시민이 운집했지만 노동조합의 깃발도 조직화된 청년들(예컨대 학생회)의 깃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조국에 대한 반발은 학벌주의에 입각해 일부 대학교에서의 촛불집회로 쪼개어졌으며, 보수세력들은 다시금 태극기를 상징으로 내세워 자신들만의 집회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촛불집회와 태극기집회, 그리고 촛불과 태극기 그 어디에서도 자신의 얼굴을 찾을 수 없는 침묵하는 다수의 투명인간들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촛불은 기도·소망하는 자의 얼굴이었고, 저항하는 자의 얼굴이었으며, 끝내 민중과 국민의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촛불이 분열에 이른 현시점,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누가 촛불을 들었었고 누가 촛불에 의해 탄생했다는 지금의 민주주의에서 소외되고 배제되어 있는가? 촛불은 과연 누구의 얼굴을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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