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외, 『반일 종족주의』, 미래사, 2019

 
 
  △ 사진출처 : 미래사  

   서구과학의 모토인 합리적 이성의 정신은 유럽을 넘어 전 세계를 근대로 재조직했다. 합리적 이성에서 발현한 근대정신은 일견 인간사회의 거의 모든 부분을 정복하는 데 성공한 듯 보이지만 양적 존재로서 대중(mass)을 정복하는데 이르진 못했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대중론에서부터 기원하는 대중사회에 대한 근대지식인의 공포에서부터 대중동원을 통한 사회혁명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근대적 이성은 자신의 방식대로 대중이라는 문제적인 존재를 끊임없이 진단하고 동원해왔다. 그러나 그것들은 일시적인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게 드러났다. 대중은 이성과 지식의 관객으로서 합리적 이성과 개인이 상연하는 지적인 활동을 멀찍이 바라볼 뿐, 정복되거나 동원되지 않은 채로 세계의 가장 첨예한 부분에 대한 결정권자로 남겨져 있다. 합리적 이성의 적자를 자처하는 21세기의 학계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간에 세계의 결정권자로서 대중과 불편하고 불안한 동거를 지속하는 중이다.

   이승만 학당과 낙성대 경제연구소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학자와 저널리스트들의 앤솔로지 『반일 종족주의』가 화제이다. 이 책은 이영훈이나 김낙년을 비롯한 학자들의 지적인 행보를 익히 아는 이라면 그다지 특별할 것 없을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그간 그들의 학술적 업적과 주장을 선정적인 제목을 내세워 ‘대중적으로’ 혹은 ‘쉽게’ 전달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이 책이 이토록 화제가 될 수 있었던 건, 다들 알다시피, 9월 현재 한국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몰이를 하고 있는 유력 정치인의 ‘페이스북 정치’에 휘말리면서부터다.

   『반일 종족주의』를 베스트셀러로 만드는 데 일조한 정치인이 책을 읽고 남긴 감상은 ‘구역질이 난다’였다. 그러나 독자로서 이 책을 읽고 나서 내가 느낀 감정은 구역질이 아니라 시시함이었다. 자신들이 쌓아놓은 한국사회 근대화에 관한 학술적 업적으로 왜곡된 한국사회의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노골적인 정념 그리고 이를 위해 자신들의 주장을 (그들의 시각으로 재구성된)한국사회의 대중과 철저하게 고립시키는, 학자적 ‘반골정신’의 전시(exhibition)에서 그런 인상을 받았다.

   책에서 설파하는 주장들 이를테면 위안부나 강제동원에 대한 필자들의 입장은 새로울 게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이 책으로 소위 ‘낙성대학파’의 주장을 처음 접할 어떤 대중들은 한국사 교과서나 설민석을 읽고서는 획득할 수 없는 한국사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누군가는 우려할지도 모를 일이지만 이것 자체를 비판하거나 문제삼고 싶진 않다. 보편적 학계의 과학적 진리에 복무하여 글을 쓴다고 자부하는 이의 한국사회 진단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초라하고 볼품없는 프레임으로 대중을 향해 돌진하는 지식인의 정념이 다소 초라하게 느껴질 따름이다. 일본보다 민사소송이 몇 배는 많다는 통계가 한국이 거짓말이 범람하는 사회라는 증거로 둔갑하고, 한국인의 ‘전통적인 물질주의적 풍조’와 샤머니즘이 결합하여 ‘반일 종족주의’의 논리가 형성됐다는 주장을 읽고 나면 머리 위에 물음표가 뜰 수밖에 없다. 필자들은 이 책을 통해 분명 무언가를 도모하려고 한다. 문제는 그 방식이 해당 주제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책을 펼쳐 든 독자들에게 어필할 가능성이 높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반일 종족주의』 안에는 그들의 반대진영 그리고 한국인에 대한 다소 뜨악한 공포와 선망이 뒤섞인 우스꽝스러운 허수아비가 존재한다. 그리고 필자들은 이 허수아비를 신나게 두들겨댄다. 그러면서 동시에 대중에 대한 ‘문화혁명’을 운운하며 모든 것을 내던진 ‘참여적 지식인’으로서 결기를 내비치기까지 한다. 시시하기 짝이 없다.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