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위기와 정동이론

 
 
  △ 사진출처 : ClipartKorea  

   정동적 전환이라는 용어는 비판적 이론과 문화 이론의 궤적에서 언어학적 전환과 문화론적 전환을 넘어서는 새로운 전환점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정동적 전환은 주로 서구 이론의 장에서 1990년대 중반 이래 이뤄진 것으로, 탈구조주의와 해체 이론의 한계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에서 출발하였다. 이론이 전화한 전개과정을 따라 이야기하자면 탈구조주의나 해체 이론에 의해 비판적 이론이 ‘주체의 죽음’이라는 거대한 빙하기에 빠져버린 국면에서 정동 이론은 ‘주체’라기보다는 ‘신체’와 그 연결체들을 다시 탐구하는 길을 열었다.   정동적 전환은 한편으로는 ‘이론 패러다임의 전환’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의 정동적 전환에 의해 이미, 여기 언제나 도착해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가까운 예로 ‘인문학의 위기’ 담론이나 ‘대학 구조조정에 따른 대학 붕괴론’을 들 수 있다. 이론으로서의 정동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논의는 너무 많지만 어쩌면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정동 이론이 개입해야할 핵심 지점은 패배를 앞당겨 살고 있는, 이론을 다뤄야 하는 연구자들의 삶이 아닐까. 낙관적 전망일지 모르지만 정동 이론은 패배를 앞당겨 살기보다는 그래도 나아가는 길을 가까스로 열어젖힌다.   최근 시행을 앞둔 개정 강사법을 두고 나타나는 여러 양태 역시 하나의 사례로 볼 수 있다. 이미 수년전부터 대학 내에 학과가 사라지거나 더 나아가 인문대 자체의 존립이 위기에 처해있다는 불안감이 도처에 팽배해있다. 물론 실제로 학과가 없어지거나 통폐합되는 사례들이 나타나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당면한 현실로 실감되기도 한다. 오늘날 인문학의 미래는 사실 이처럼 임박하거나 도래한 위기에 대한 불안감을 떠나서는 논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여기서 인문학의 미래와 위기감, 불안감이라는 것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할까? 누군가는 파국에 대비하는 현실적인 대책을 함께 준비하기도 할 것이고, 누군가는 ‘대열’에서 이탈할 것이며, 누군가는 그저 체념과 무기력을 곱씹으며, 하루하루를 버텨나갈 것이다.   나는 이전 연구에서 실제 한 대학에서 일어난 학과 구조조정 전후의 사례를 통해 인문학과 정동의 미래에 대해 논한 적이 있다. 사례로 다룬 A 대학의 경우 흥미로운 점은 폐과, 해소 등의 위협적인 수사로 점철된 흉흉한 소문들이 아직은 어떤 사실로도 입증된 바가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미 A 대학의 구성원들은 이 소문을 사실로 인지하고 있었다. 즉 인문대 해소나 인문대 학과의 폐과 등은 아직 A 대학에서는 실제로는 사실로서 확증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구성원들은 공히 이를 ‘사실’로서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소문이라는 형식으로 떠도는 불안감과 위기감이 바로 이 인문대의 위기를 현실화하고 있었다. 물론 이 소문이 아직은 실제 사실로서 확인된 바는 없지만, 구성원들은 그 소문 속에서 어떤 사실을 인지한다. 즉 소문을 통해 사람들이 불안감을 느끼거나 위기감을 느끼는 것이 단지 근거 없는 것이라거나, 과대망상적인 것만은 아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소문을 들으면서 폐과나 인문대 해소라는 차원을 위협적으로 실감하는데, 흥미로운 것은 실상 여기서 폐과나 해소 등은 아직 현실화되지 않았고 그런 점에서 실제적 사실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소문의 구조에는 실은 서로 상이한 현실이 작동한다. 즉 실제적 사실과 이와는 아주 다른 차원에서의 사람들이 감지하는 사실이 그것이다. 즉 사람들은 이러한 소문을 들으면서 폐과나 해소 등의 사실이 마치 임박한 것처럼 감지한다. 실상 폐과나 해소 등의 사실은 현재로서는 아직은 도래하지 않았지만, 실감의 차원에서는 이미 도래해있다. 정동 이론의 개념을 따르자면 이러한 사실이 바로 정동적 사실(affective fact)이다.   브라이언 마수미는 사실(fact)과 실재성(reality)이 구성되는 체계에서 정동의 작동 방식을 설명하면서 실제적 사실이 구성됨에 있어서의 정동적 차원을 논의한다. 먼저 여기서 실제적인 사실이란 규범적인 체계(normative system 규칙이나 관습 또는 합의와 같은)에 의해 규정된 상황을 의미한다. 규범적 체계에 의한 규정에 입각한 판단은(예를 들면 사법 체계나 행정 검토 체계 혹은 동료간 검토 과정 같은) 공적으로 인지되고 인정되는 사실을 구성한다. 따라서 이러한 실제적인 사실을 둘러싼 판단 체계의 작동은 전혀 선제적(preempted)<각주①>이지 않다. 그런데 어떠한 종류의 사실이 구성될 때 이와는 다소 다른 차원이 작동되는 사례들을 볼 수 있다. 일례로 앞의 사례에서 소문을 통해 사람들이 느끼는 위협과 불안은 실제적인 사실이라기보다 느껴진 실제(felt reality)로서의 위협이다. 이러한 위협은 실제라고 느껴졌기 때문에 실제가 되어 있을 수 있다. 즉 어떤 위협이나 위기가 실제로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았던 그 위협은 두려움이라는 형식으로 감지되었다. 물질적 실제가 아닌 것이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감지될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이런 종류의 위협은 현재에 임박한 실재성을 갖는다.<각주②> 소문을 전해 듣는 A 대학의 구성원들이 실제로는 폐과나 해소에 대한 위협적인 결정이 전혀 사실로서 확인된 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것을 임박한 실제로 느낀 것은 바로 정동적 사실(affective fact)의 이러한 성격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위의 사례에서 또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폐과나 해소와 같은 위협이 미래와 현재를 특별한 방식으로 연결하는 지점이다. 즉 A학교의 사례에서도 나타나듯이 실상 인문학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불안한 미래에 대한 위협은 현재 임박한 현실로서 감지된다. 위협이란 현재의 차원에서 임박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또한 두려움이란 위협적인 미래를 현재의 형식으로 선취한 리얼리티이다. 그런 점에서 두려움은 존재하지 않는 것의 감지된 리얼리티이며, 정동적 사실을 통해서 그러한 존재하지 않는 것이 희미한 윤곽을 갖게 되는 것이다.<각주③>그런 점에서 인문학 위기 담론에서 반복해서 출현하는 ‘존재 기반을 뒤흔드는 외적 위협에 대한 두려움’은 전형적인 정동적 사실의 속성들을 반복한다. 달리 말하자면 ‘인문학의 위기’라는 것이 제창된 이후 인문학의 미래는 항상 이런 위협과 두려움을 통해 구축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인문학의 리얼리티는 인문학의 위기 담론을 기점으로 정동적으로 전환되었다.   따라서 정동적 전환과 인문학의 미래는 정동이론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인문학의 리얼리티 구성 방식의 변화 자체로부터 도래했다. 즉 정동적 전환이란 단지 정동 이론의 ‘도래’라는 이론적 국면에서 비롯된 차원만이 아니라, 이미 위기로서 구성된 인문학의 현실로부터 ‘긴박성’의 형식으로 먼저 도래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2000년대 중반 이래 관용어가 되어버린 ‘인문학의 위기’라는 것을 단지 인문학의 현실적 조건의 변화라는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인문학 자체의 현실감이나 리얼리티 구성 방식의 변화라는 차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문학 위기 담론에 대해서는 여러 방향에서 비판이 제기된 바도 있다.   나는 여기서 인문학 위기 담론을 인문학이 그 자신의 리얼리티와 물질적 기반을 정동적 리얼리티와 비물질성으로 전환시킨 계기로서 다시 고찰해보고자 한다. 순수학문의 위기가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일례로 사회과학의 위기나, 자연과학의 위기라는 담론은 관용어법으로 정착되지 않은 것에 비교해보자면, ‘인문학의 위기’ 혹은 더 나아가 ‘문학의 위기’라는 것이 관용어법으로 정착된 것은 위기 담론이 인문학에 특유한 현실성을 구축하는 역할을 해왔다는 것을 반증한다.   앞서 A대학의 사례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나듯이 위기 담론은 전형적인 정동 주도적 논리(affect driven logic)를 구축하여, 이른바 실제 사실과는 다른 방식으로 현실을 인지하거나, 감지된 현실을 구성한다. 여기서 이러한 정동적 리얼리티가 단지 허구이거나 과장된 위기감의 산물만은 아니라는 점을 다시 강조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정동적 리얼리티로서 위기감이라는 것이 인문학이라는 주체성을 어떻게 재구성하였는지를 고찰하는 것이 오히려 중요할 것이다. 인문학 내부에 국한해서 보자면 인문학의 위기 담론은 인문학 혹은 인문학자의 주체성을 아직 도래하지도 않은 패배를 먼저 살고 있는 미래 완료형 패배자로 구성한 것처럼 보인다. 앞서 A 대학의 사례에서, 아직 도래하지 않은 ‘해소’의 위기감이 대학 구성원으로 하여금 도래하지 않은 패배를 현실로서 받아들이고, 시작되지도 않은 싸움에서 이미 패배한 패배자로 만들었듯이 말이다. 즉 A 대학의 사례에서 이 대학의 인문대 구성원들은 어떤 점에서 미래에 도래할, 실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형의 패배를 현재형으로 ‘이미’ 감지하고 있으며, 이러한 감지를 통해 그 패배는 미래가 아닌 현재에 도래한다. 물론 그 패배는 아직은 오지 않았다. 임박한 파국이란 그런 점에서 언제나 지연되는 미래형의 패배와 위협을 현재로 현실화한다. 그런 점에서 인문학의 위기 담론이 위기라는 정동적 리얼리티를 통해 구축한 인문학의 주체성 역시 그런 점에서 아직 도래하지 않은 패배를 현재형으로 실감하는, 미래완료형의 패배자의 형식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인문학의 위기 담론을 경유하면서 인문학자란 아직 도래하지 않은 패배를 미리 앞당겨 살고 있는 패배자가 되었다. 이 패배는 미래 완료의 형식을 지닌다. 미래가 이미 여기에 패배의 형식으로 도래해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위기와 불안으로 감지되는 인문학의 미래란 정동적 사실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동적 사실에 의해 추동되는 인문학의 ‘미래’ 속에서 오늘날 우리 인문학자들은 아직 전투를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이미 패배자가 되었다. 정동 이론은 이렇게 이미 패배를 앞당겨 살고 있는 ‘우리’ 인문학자들과 연구자들의 정동적 삶을 분석하는 데도 유효하겠다. 그러나 무엇보다 패배를 앞당겨 사느니, 어떻게라도 나아가는 작은 길을 열어나가려는 부대낌과 애씀이 정동 이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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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① Brian Masumi, "The Future Birth of the Affective fact", The affect theory reader, Melissa Gregg and Gregory J. Seig edit, (Duke University Press, Durham & London, 2010), p66, note 2.◆각주 ② Brian Masumi, "The Future Birth of the Affective fact", ibid, p, 54.◆각주 ③ 브라이언 마수미는 이른바 이라크의 잠재적 위협에 대한 부시 정권의 선제 공격을 분석하면서 이러한 논의를 진행한다. 나는 여기서 마수미의 논의를 A 대학의 사례를 분석하는 방법론으로 빌어 쓰고 있다. Brian Masumi, "The Future Birth of the Affective fact" 참조. 부시 정부의 경우 이라크의 잠재적 위협을 ‘이중가정’의 형식을 통해 실제화하는 방식으로 위성 촬영 장치와 이에서 전송된 이미지를 전지구적으로 발송하는 다양한 테크놀로지를 총동원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전송 자체가 이미 “잠재적인 위협”에 대한 선제적 공격을 예비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에 비해 A대학의 경우는 소문이라는 다분히 전근대적으로도 보이고, 고전적인 산업 자본주의 시대를 풍미한 것과 같은 오랄 미디어의 매개들을 통해서 위협을 가시화한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정동적 현실의 구축은 단지 신자유주의 시대의 최첨단 미디어의 전송 뿐 아니라, 소문과 같은 오랄 미디어를 작동한 ‘고전적’ 전략까지도 동원된다는 점에서 총력전적인 과잉의 형식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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