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연대 사회가 두려워하는 여성들의 행동

 
 
  △ 사진출처 : ClipartKorea  
 

   23차례나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테니스 선수 세레나 윌리엄스가 얼마 전 US오픈 결승에서 화를 내고 주심에게 항의한 사건이 있었다. 그는 경기 중 라켓을 팽개치는 등 자신의 감정을 적극 표출하여 경고를 받았고 이에 윌리엄스는 다시 항의했다. 경기 흐름을 잃어버린 그는 결국 패했다. 윌리엄스의 행동이 과했다는 지적도 있고 심판을 야유하는 목소리도 있다. 테니스 경기 규정에 대해 지식이 없는 나는 이를 판단할 능력이 없다.

   그런데 이 사안을 다룬 호주 언론의 한 만평은 인상적이다. 격분해서 방방 뛰고 있는 윌리엄스의 과장된 태도는 만평의 특성상 그럴 수 있다. 문제는 윌리엄스의 외모를 묘사한 방식과 바닥에 떨어진 젖병 꼭지다. 그의 외모를 과장하면서 흑인임을 강조하고, 젖병을 통해 그의 행동이 어린아이 같다고 조롱한다. 경기중 화를 내는 운동 선수의 태도를 문제 삼기보다는 ‘흑인 여성’에 대한 조롱으로 볼 소지가 다분하다. 언제나 그렇듯이 해당 만화가는 당연히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당연히 그럴 의도가 없을 수 밖에. 아시아인의 외모를 강조하느라 눈을 찢는 행동을 보이는 백인들도 늘 ‘그럴 의도는 없었다’고 한다.

   사람의 정체성을 문제 삼거나 언급할 때 대부분 어떤 의도를 가지진 않는다. 의도를 가질 필요가 없다. 차별적인 발언이나 성희롱도 반드시 의식적인 의도를 가지고 행하는 일이 아니다. 의도할 필요조차 없는, 사회적으로 다수가 공유하는 태도이기에 문제를 인식할 필요가 없는, 몸에서 툭툭 흘러나오는 차별적인 행동들이 있다. 훨씬 대항하기 어려운 폭력은 바로 이렇게 아무런 의도 없이 벌어지는 공기같은 차별이다. 그럴 의도 없었다는 변명을 볼 때마다 헛웃음이 나온다. 아무 생각없이 누군가를 조롱해도 안전한 위치에 있다는 게 바로 권력이기 때문이다.

   사회의 다양한 곳에서 공기같은 차별에 대항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나오는 중이다. 여성들이 과하게 화를 내기 때문에 오히려 여성의 말을 들어주고 싶지 않다며 이 목소리를 제지하려는 힘도 강력하다. 소위 ‘갑질’ 한다는 재벌가 사람들의 화내는 모습이 폭로된 적이 있다. 그들의 화는 ‘아랫사람들’을 지배하는 무기다. 권력이 있는 사람의 흥분은 두려움을 주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조롱의 대상이 된다. ‘화’가 아니라, 화를 내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반응이 달라진다.

   여성의 ‘과격한’ 언어가 페미니즘을 오해하게 만든다고 우려하기도 한다. 페미니즘이 오해받는 걱정보다는 여성이라는 존재 자체가 오해받는 게 문제다.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라는 증후군이 있을 정도로 여성들은 오해받지 않기 위해 조심했다. 3년 전부터는 “나는 메갈은 아니지만”이라고 하더니 이제는 “나는 워마드 안 하지만”이라고 한다. 워마드 운영자 수사가 과연 ‘비워마드’ 여성과 무관할까. 그렇지 않다. 이는 워마드를 빌미로 여성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행동이다. 너희가 이 선을 넘으면 이렇게 처벌받을 수 있어, 라고 이 사회가 여성에게 경고를 주는 행위다.

   분노가 늘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진 않지만, 침묵을 강요당하는 이들에게는 분노의 경험이 중요하다. 왜 차분한 설득이 아니라 공격적으로 행동하냐고 여성을 지적하는 목소리는 실은 기만적이다. 여성을 꾸준히 남성의 인정에 묶어두겠다는 처사다. 남성의 인정에 연연하지 않는 것, 그것이 남성연대 사회가 두려워하는 여성들의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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