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영호, 『3층 서기실의 암호』, 기파랑, 2018.

 
 
     

  2018년 4월 28일 남북정상회담은 북핵문제와 근대국가 사상 전례 없던 삼대세습 이후 급속하게 경색됐던 한반도 평화·통일문제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사건이었다. 판문점에서 만나 두 손을 맞잡고 공통된 대의로서 평화통일의 도정에 이견 없이 합의하는 남북정상의 모습에서 대부분의 국민들은 새로운 시대에 진입했다는 감동을 느꼈을 것이다. 벅찬 감정의 여운을 간접적으로나마 다시금 음미하기 위해 평양냉면 음식점을 기웃거린 이가 나 혼자만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남북 정상회담의 역사적 의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 근본적으로 바뀐 것은 아직 없다.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의 성공에 힘입어 올해 6월 싱가포르에서 개최된 북미정상회담은 사상최초 북미정상 간의 직접적인 만남이라는 역사적인 진일보였다. 그러나 북미정상회담은 1990년대 이후 지속되어온 핵무기를 통한 북한의 체제수호적 외교전술과 이에 대응하는 미국의 심대한 이견차를 다시금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전(前)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이자 현(現) 국가안보전략 연구원 자문연구위원 태영호의 자서전 『3층 서기실의 암호』는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이라는, 한반도 후기냉전체제의 해빙기에 출간된 의미심장한 책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저자 태영호는 김정은 체제에 염증을 느껴 남한으로 망명한 북한의 고위 엘리트 외교관이었다. 그는 김정은 통치제체의 북한을 유보 없이 노예사회·왕조체제로 단언한다. 그러면서 고난의 행군시기 이래로 싹튼 북한인민들의 체제에 대한 반감 그리고 폭압적인 통제와 탄압에도 누그러지지 않는 장마당에서의 시장경제 감각이 한반도 통일과 변화의 씨앗임을 역설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체제수호의 일익을 담당하기도 했던 김정일 이래 북한체제를 비판한다. 현재의 북한정권은 한반도의 통일이나 인민의 경제생활을 방기한 채 국가의 모든 역량을 김씨 일가의 권력유지에만 쏟아 붓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저자가 탈냉전 시대 국제외교의 최전선에서 고군분투하며 얻은 소기의 성과들이 김씨 일가의 부와 권력유지의 수단으로 유용되는 과정이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 북한에 남겨진 가족들과 궁핍으로 신음하는 인민들을 생각하며 온 힘을 다해 활동했지만 돌아오는 건 망명을 염려하며 자식을 인질로 삼는 비인간적인 통제이다. 희망 없는 삼대세습 체제와 갈수록 옥죄어오는 ‘당의 명령’은 그를 북한체제에 대한 의구심으로 몰고 간다. 저자는 평생을 ‘전체’를 위해 헌신하면서 변화하는 세계의 전모와 자신이 복무하는 체제의 괴리를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로열 앨버트 홀에서 열린 에릭 클랩튼 공연을 보러 런던을 방문한 김정철을 수행한 경험을 자세하게 묘사한 대목에서는 국가 엘리트로서 극에 달한 체제에 대한 환멸을 마주하게 된다.

  태영호의 증언은 남북의 정상이 벤치에 앉아 한반도의 미래구상을 허심탄회하게 논의하는 장면에 환호하는 시대에 불편함을 선사한다. 나 또한, 책의 내용을 포함하여, 남한국민으로서 태영호의 정치적 행보 전부에 동의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가 선사하는 ‘불편함’만큼은 두 팔 벌려 환대한다. 남북정상회담 이후의 환호와 태영호의 불편함이 공존하는 작금의 세태야말로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로서 남한국민들이 대면해야 할 진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본모습을 단 한번도 ‘라이브’로 언론에 노출한 적 없던 북한 최고지도자의 육성과 제스처가 전 세계로 송출되는 시대이다. 여기서 그쳐선 안 된다. 더 많은 한반도 문제 당사자들의 ‘라이브’가 필요하다. 태영호의 증언록이 주는 ‘불편함’은 그 시작으로 손색이 없다. 현재의 남한은 지금보다 더 많은 한반도 문제의 ‘불편함’을 수용할 역량을 갖추고 있다고 믿는다. 태영호가 미국이나 제삼국이 아닌 남한을 택한 이유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남한사회에 더 많은 태영호가 존재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태영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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