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ain Badiou, In Praise of Theatre, trans. Andrew Bielski, Polity Press, 2015.

 
 
 

  알랭 바디우라는 고유명의 반향이 울려온다. 국내에서 라캉이나 들뢰즈를 비롯한 여타의 인물들에 비해 인기가 덜한 것처럼 보이는 이 노학자에 대하여, 혹자는 데리다의 사망 이후 그를 프랑스 철학의 태두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나 역시 여러모로 그의 사유과정에 깊게 매료되어 있음을 밝힌다. 그가 보여주는 집합론의 아름다운 사용에 대해 감동할 뿐만 아니라 그가 논하는 진리와 주체의 정당한 필요성에 공감하며, 그로 인하여 나는 조건과 결론을 혼동해서는 안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또한 바디우는 예술을, 특히 연극을 그들 자신의 사유에서 빼놓지 않고, 심지어 들뢰즈처럼 사유의 중심에 가까이 놓았던 수많은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연극을 공부하고 창작하는 입장에서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될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저명한 철학자이면서도 극작가이고, 앙투안 비테즈의 절친한 동료이기도 하며, 특히 ‘연극’의 능력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주지하듯 그는 진리의 생산이 철학이 아니라 과학, 사랑, 예술, 정치의 영역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에 따르면 연극은 여타의 예술들 중에서도 특별한 것인데, 그 이유는 연극이 내재성과 초월성을 무매개적으로 결합하는 예술 양식이기 때문이다. 연극이 개시하는 사이적 공간에서, 그 진리 과정에 충실하게 투신하는 주체에 의해 존재론적 변화인 사건이 도래한다. 이 진리 과정의 지향점에 연극-이념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위치하며, 이 의미장에 등장하는 사건적 주체들이 윤리적으로 요청될 수 있다. 그러므로 연극은 또한 정치적인 것이기도 하다.  언어적 전회를 거쳐 지금 우리는 새로운 존재론적 전회를 맞이하고 있다. 요즈음의 사유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다양성의 사유라고 통칭될 수 있을 것인데, 바디우는 이 경향에 대항하는 입장을 견지하지만 결코 다양성 자체를 배척하지 않는다. 비록 강경하고 폭력적으로 느껴질지라도, 그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것을 수용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다양성’이라는 것을 결론으로 제시하는 그간의 경향이다. 이 때 우리는 조건을 결론으로서 주장하는 유아론적 도착을 상식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지점에 이르게 된다. 타자의 요청은 어디까지나 절대적, 초월론적 타자 없이 이루어져야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그것은 물신화되며 따라서 파시즘의 새로운 판본의 등장에 그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조건을 조건으로서 사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본서는 바디우의 연극을 주제로 한 대화록이다. 국내에 이미 『비미학』이 번역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은 기 출판된 『사랑 예찬』처럼 그의 사유를 대화 속에서 펼치고 있다는 점에서 바디우의 연극적 사유를 이해하는 친절한 입구가 되는 바, 이에 소개하고자 한다. 이 대화는 아비뇽 연극 페스티벌의 ‘사유들의 연극(Le Theatre des idees)’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시도되는 연극과 철학 사이의 토론으로서 기획된 것이다. 본서에 앞서 그의 연극 이론적 구축작업의 상세에 대해서는 『비미학』과 더불어 『Rhapsody for the Theatre』가 있으니 참고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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