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보니 남극에서 두 번의 여름을 보내고 왔습니다. 과학자들과 함께요. 남극이라니. 달만큼이나 아득한 곳이죠. 남극에 다녀왔다 하면 사람들이 물어요. 거기 얼마나 추워? 펭귄 봤어? 빙하는? 그래서 어땠어? 보통은 이 순서입니다. 물론 춥습니다. 여름이어도 남극은 남극이니까. 펭귄과 빙하는 수도 없이 봤구요. 그래서 어땠냐면, 글쎄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그러니까 그걸 한 마디로 말하자면, 내가 우주의 한 존재라는 걸 느꼈다고나 할까,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뜬 구름 잡는 얘기, 식상한 은유 같지요. 그런데 이렇게 한 문장으로 정리하기까지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하지만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렸다거나 섬광같은 깨달음을 얻었다거나 하는 식의 경험을 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강력한 파동이 아니라 그저 내 생의 축을 살짝, 아주 살짝 틀게 만든 미세한 진동을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그 틀어진 방향이 가리키는 바는 아주 먼 훗날에나 알게 되겠지요. 축이 바뀐다는 건 그런 의미니까요. 어쨌거나 겨우 그 한 문장, 나는 우주의 한 존재다, 이 뻔한 문장을 남극에 가서야 느끼게 되었다니 좀 부끄럽습니다. 밤하늘의 별만 보아도 우주가 있고, 나뭇잎 한 장에도 우주가 있다 여기는데. 물론 저도 머릿속으로는 다 알고 있었어요. 정말 알고 있었다니까요. 몸으로 느끼지 못해서 그랬지. 그러니까 남극에서는 그걸 진짜 몸으로 느꼈다는 얘기인데, 그렇다고 남극행을 권유할 수는 없고. 대신 몇 권의 책을 권해 드리겠습니다. 남극 책은 아닙니다.  『숲에서 우주를 보다』 지은이는  데이비드 조지 해스컬. 생물학자입니다. 남극이 아니라 숲에서 우주를 봤군요. 그것도 딱 1 제곱미터 조각 땅에서. 책날개에 있는 사진을 보니 그가 어떻게 우주를 발견했는지 알겠습니다. 돋보기 같은 걸 들고 땅바닥에 코를 박고 무언가 골똘히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는 숲의 동물처럼 추위를 경험하고 싶어서 충동적으로 옷을 다 벗고 숲속에 벌거벗은 채 서 있기도 했답니다. 박새처럼 되어보고 싶었다나요? 하지만 인간은 박새가 아닌 걸. 그걸 인정한 후에 뒤따라온 감정은 존경심이었습니다. 이것은 우주적 존재가 되기 위한 가장 처음의 마음가짐이지요. 다른 진화적 경로를 걸어온 각기 다른 생명체에 대한 존경심.   다른 존재를 인식했다면 다음으로는 다른 존재가 되어 볼 일입니다. 무엇이 되어 볼까요? 데이비드처럼 새가 되어보죠. 『새의 감각』과 『메이블 이야기』 두 권의 책을 나란히 놓습니다. 『새의 감각』은 새가 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라는 부제가 달렸습니다. 말 그대로입니다. 키위가 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계절에 따라 노랫소리는 어떻게 달라질까. 지구의 자기장을 어떻게 느낄까. 궁금증을 사각사각 긁어주는 책입니다. 『메이블 이야기』는 참매 길들이는 과정을 담은 책입니다. 매를 길들이며 슬픔을 견디고 다시 자신의 삶을 살게 된 한 사람의 이야기. 길들인다. 이 말은 훈련, 반복, 우위, 소유, 정복과 같은 단어를 연상시킵니다. 정말 인간중심의 단어지요. 하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그 단어들이 사라질 겁니다. 그리고 대신 공유라는 단어가 들어올 것입니다. 결코 다른 존재가 될 순 없지만 다른 존재와 감각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매와 함께 저 위에 있는 기분을 느껴보기. 3D IMAX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가능합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다른 존재와 감각을 공유한 자는 모두가 시인이라는 겁니다. 정말 아름다운 책입니다.   그 다음은 『무경계』입니다. 역시 부제가 달렸습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관한 동서고금의 통합적 접근. 엄청 어려울 것 같은 주제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처럼 오래된, 하지만 영원히 알지 못할 것 같은, 질문이 또 있을까요? 이 책은 소위 ‘깨달음’이나 ‘해탈’과 같은 의식 수행을 위한 학술적인 저술이었습니다. 종교적인 의식 같은 거냐고요? 아닙니다. 의식이라면 경계를 지우기 위한 의식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나’와 ‘너’, ‘안’과 ‘밖’, ‘우주’와 ‘나’의 경계. 그것은 공유의 차원을 넘어서는 과정입니다. 우주의 한 존재가 아니라 우주 그 자체가 되기 위한 의식의 과정. 이것은 무척이나 어려워 보입니다. ‘나’를 생각하는 순간 이미 경계가 그어진 것이니까요. 그래서 수양이니 수련이니 하는 행위가 필요한가 봅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나도 남극에서 그 비슷한 과정을 거친 것 같습니다. 그저 과학자들과 함께 걸으면서 묻고 대답하다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화석연구자와 함께 하루 종일 돌을 깨서 나무화석을 찾고, 생태학자와 함께 식물의 숫자를 셌습니다. 하나 둘 셋. 진짜로 셉니다. 그리고 그 범위를 조금씩 넓혀나가죠. 문득 내가 밟고 서 있는 식물의 나이가 궁금해 물었습니다. 1년에 0.1mm씩 100년을 자라야 1cm. 그러니까 이 조그마한 게 천년을 견뎌낸 생명이란 말이지. 여름 한철 태양의 힘을 빌어 0.1mm씩 천년이라. 미세하게 축이 흔들린 건 그때였던 것 같아요. 갑자기 내 존재가 작게 느껴지고 각기 다른 삶을 가진 다른 생명들이 보이기 시작했죠. 속도와 시간에 대한 감각이 다르게 느껴졌고요.   지구의 주인행세를 하며 다른 생명체를 파괴하는 오만한 인간의 시간이 아니라, 100년의 겨울을 견뎌내고 손톱만큼 자란 식물의 시간. 호기심을 가지고 다른 존재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지구의 수많은 생명체 중 하나. 나는 우주의 작은 한 존재구나. 그래서 나는 외롭지 않구나. 뭐 그런 느낌. 어쩐지 시인이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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