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생 문예지 『악스트』와 『애널리얼리즘』의 등장

 
 
 
  ‘문학 권력’이라는 추상적 개념이 적어도 최근 10년간 올해만큼 빈번하게 쓰인 해는 없을 것이다. 신경숙 소설의 표절 시비 이후, SNS, 공중파 뉴스 등에서 문학 권력이라는 말은 그 용어에 대한 진득한 논의를 건너뛴 채 발설되어 왔다. 그리고 그 여파로 『문학동네』에 이어 『창작과비평』의 주요 편집위원들이 사퇴 의사를 표명했다. 문제는 곧바로 ‘문학 권력의 해체인가 교체인가’로 이어졌다. 마침 등장한 신생 문예지 『악스트Axt』와 『애널리얼리즘Analrealism』은 이러한 의문을 증폭시켰다.  먼저 『악스트』를 살펴보자. 소위 ‘A급 필진’의 글들로 가득 채워진 이 문예지는 언뜻 보면 기존의 문예지와 별반 다를 것 없어 보인다. 그러나 최근 주요 문예지들이 리뷰란을 크게 줄인 것에 반해, 시작부터 25권 정도에 달하는 작품들에 대한 리뷰란으로 잡지의 절반을 채운 것이 눈에 띈다. 이는 다양한 작품들을 일반 독자들에게 소개함으로써 저마다의 취향에 따라 작품을 선택하여 읽어나가는 습관을 기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악스트는 독일어로 도끼라는 뜻이다. 창간사에서 편집진들은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는 카프카의 유명한 발언을 빌려 잡지명을 정했음을 밝히며 “우리가 들고 있는 도끼가 가장 먼저 쪼갤 것은 문학이 지루하다는 편견입니다. 『악스트』는 지리멸렬을 권위로 삼은 상상력에 대한 저항입니다.”라고 창간 취지에 대해 설명한다. 이에 따르면 자연스레 『악스트』 이전은 ‘얼어붙은 바다’, ‘문학이 지루하다는 편견’, ‘지리멸렬을 권위로 삼은 상상력’이 팽배한 공간쯤으로 정의된다.   다음으로 조금 민망하게도 ‘후장사실주의’로 번역되는 『애널리얼리즘』은 롤랑바르트의 발언을 토대로 창간 취지를 설명한다. 『롤랑바르트, 마지막 강의』에서 그가 “지속하기 위해 희망할 필요는 없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한 것에 주목한다. 창간사에서 이들은 바르트를 이어받아 마찬가지로 의미심장한 발언을 이어나간다. “나는 지난 세기의 사람들을 사랑하는데 그들은 모두 희망광이었다. 그들에겐 비관적이든 낙관적이든 망상이 있었다. 당시에는 망상인지 몰랐을 뿐이다. 지금은 아무도 망상을 가지지 않는다. 우리는 망상을 가질 권리를 잃었다. 너무 많은 실패와 너무 많은 좌절과 너무 많은 변절을 봐왔다.”라고.  『악스트』가 악스트 이전을 ‘얼어붙은 바다’ 정도로 정리했다면, 『애널리얼리즘』은 애널리얼리즘 이전을 ‘희망 없음’, ‘너무 많은 실패, 좌절, 변절’이 존재한 공간으로 정의한다. 『악스트』와 『애널리얼리즘』 모두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기성 문단, 문학 권력이라고 불리는 것의 반대선상에 서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다면 문학 권력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리도 필사적으로 그 반대편으로 가기 위해 애쓰는가.   서영채는 최근 『문학동네』 2015년 겨울호에서 이제 문학동네의 편집위원 직에서 물러나게 되었음을 밝히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문학 권력이란 편집권을 행사하는 것인데, 편집권이란 것 자체가 일종의 형용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편집(문학)과 권(권력)의 결합관계가 그렇다는 것이지요. 저울을 관장하는 권력은 공정해야 하지만, 문학은 반대로 치우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문학잡지를 만드는 일, 그 잡지가 의도하는 생각을 실현하는 일은, 말하자면 공평무사하고 공명정대하게 극단적으로 치우치는 일입니다.”   기시감이 들지 않는가. 서영채의 이와 같은 발언은 한 발짝 물러나서 보았을 때 『악스트』, 그리고 『애널리얼리즘』의 창간 취지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편집위원 자리에서 물러나며’가 아니라 ‘편집위원 자리를 맡게 되며’ 쯤으로 글의 제목을 바꾸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이다. 이는 ‘문학 권력’이라는 개념에 대해 또다시 회의하게 만든다.   『악스트』 최신호에는 박민규의「팔레스라엘」이라는 단편이 실려 있다. 박민규는 이 소설을 통해 나치 통치 하에 핍박받던 유태인이 어느새, 순식간에 팔레스타인 안에 이스라엘을 건국하고는 가해자가 되어버린 역설적인 상황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즉 「팔레스라엘」은 ‘권력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작가는 절대 권력에 저항하려 애쓰던, 반대선상에 서려 노력하던 자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금세 그 ‘반대선상’에서 필연적으로 또 다른 절대 권력을 형성하게 되고야 마는 순리에 대해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소설은 우리로 하여금 ‘권력 만들기/권력 깨기’의 이분법적 구조보다, 지금은 권력화된, 권력화 되었다고 여겨지는 기존의 논리·집단의 시작점, 나아가 그에 반하는 새로운 깨우침의 시작점으로 돌아가 생각하도록 만든다.  정리하자면 문학은 새로운 치우침, 깨우침의 연속이다. 이제 막 새로운 깨우침이 더해졌을 뿐이다. 그러니 너무, 아쉬워는 말라.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