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책

 
 
 

  엊그제 사람들을 만나 밥을 먹으며 말했다. 일주일 만에 사람이랑 같이 밥을 먹는다고. 내 말을 듣고 다들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도 있어서, 일주일 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고 혼자 지냈다고 설명했다. 일부러 사람을 피한 거냐고 묻기에, 그런 건 아니고 내 생활이 원래 그렇다고 대답했다. 약속이 없다면 한 달이든 두 달이든 아무도 만나지 않을 수 있고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생활. 혼자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밥을 먹고 술을 마시는 흔한 나날들.

  대학 시절에도 많은 날을 혼자 보냈다. 정말 필요한 순간 외에는 말을 잘 하지 않았고, 공강 시간에는 건물 옥상이나 비상계단에 앉아 책을 읽었다. 요즘의 ‘대학생 나홀로족’과 비슷했다. 혼자인 게 어색하지도, 외롭다는 감정이 불편하지도 않았다. 돈도 없고 친구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없던 그날들. 그날 중의 어느 날 진이정 시인의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를 만났다. 이후 그 시집은 내 삶의 바이블이 되었다. 나는 그의 시를 절대 자주 보지 않는다. 마음이 정말 힘들거나 괴로울 때, 깊은 불행감에 빠졌을 때만 약을 먹듯 그의 시를 펼쳐본다. 그의 시는 내 마음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내가 말로 표현 하지 못하는 많은 감정과 생각이 그의 시에는 고독하고 아픈 글자로 선명하게 적혀 있다. 단어 하나, 문장 한 줄에서 눈을 떼기 힘들어 시 한 편을 읽는 데도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 

 
 
 

  대학을 졸업하고 삼사 년 간은 직장 동료나 가족과 밥을 먹었고,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았다. 그래도 혼자라는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람들 속에서 말하고 웃으면서도 다시 혼자가 될 시간을 기다렸다. 세상이 까맣게 고요해지는 자정에서 새벽 두세 시까지가 바로 그 시간. 나는 동굴 같은 방에 스탠드만 켜놓고 앉아 글을 쓰거나 책을 봤다. 그 시절에 파스칼 보나푸의『빈센트가 그린 반 고흐』를 만났다. 이후 글 쓰는 일이 무의미하거나 어렵다고 생각될 때면, 글쓰기에 주눅이 들고 자신이 없어지면, 고흐의 편지를 찾아 읽는다. 진이정의 시를 읽을 때처럼 무작위로 펼쳐 아무 문장이나 읽는다. 읽으며 진심이 담긴 문장에 대해 생각한다. 진심과 고독과 열정으로 쓰인 문장과 그런 문장을 가능케 하는 삶에 대하여. 그러다 보면 어느새 나는 ‘굉장히 글을 쓰고 싶어 하는 나’로 돌아와 있다. 오직 쓰고 싶다는 욕망만으로 글을 쓰던, 아무도 읽지 않고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처음의 나로.

  그 시기에 K.C 콜의 『우주의 구멍』이란 책도 읽었다. 그 책을 읽으며 우주를 상상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제일 먼저 접한 과학책이라서 『우주의 구멍』을 내세우는 것일 뿐, 『코스모스』나 『멀티 유니버스』, 『양자 불가사의』나 『우주의 풍경』도 좋다. 데이비드 보더니스의 과학책도 아주 재미있다. 내 삶이 비루하고 지루하여 정말 재미없다고 느껴질 때면 이런 책들을 펼쳐 든다. 이상하게도, 우주에 관한 책을 읽다 보면 나란 인간을 거부감 없이 사랑하게 된다. 우주는 정말 멋지고 아름다운데, 나 역시 우주니까. 우주의 원리로 만들어졌고 우주의 원리로 존재하고 있으니까. 어떤 시나 소설에서도 얻지 못하는 정신적 고양과 깜찍한 주문을 얻게 되는 것이다. 아주 넓은 트램펄린 위에서 점프, 점프, 점프하는 기분. 

  서른 넘어 카뮈의 책을 읽었다. 『시지프 신화』와 『반항하는 인간』은 내 인생의 나침반과 같은 책이다. 강렬하고 섹시하고 단단한 카뮈의 사상. 그의 싱싱하고 첨예한 글을 볼 때마다 나의 아둔하고 편이한 생각이 부끄러워진다. 스스로 이 세상의 방식과 틀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고 느낄 때, 아무 생각 없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것들이 많아질 때,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그토록 꺼리던 비겁하고 못난 어른의 흉내를 내고 있음을 깨달을 때마다 카뮈의 책을 꺼낸다. 역시나 무작위로 아무 쪽이나 펼쳐 읽는다. 카뮈의 문장은 거울처럼 나를 비춘다. 비친 내 모습이 가장 멀리하고 싶던 나에 가깝다면, 위험한 것이다. 그런 나를 버리고 아주 멀리 도망쳐야 할 때다.

  장 주네의 『도둑 일기』와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은 애인 같은 책이다. 너무 매력적이라서 절대 내 것이 될 수 없고, 내겐 관심도 없는 도도한 애인. 나는 당신을 잘 모른다. 당신은 늘 바쁘고 비밀이 많다. 당신을 자주 만날 수 없어서 나는 당신을 상상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상상이 미칠 듯 좋다. 당신에게는 새로운 비밀이 계속 생긴다. 나는 그 비밀을 계속 쫓아간다. 당신을 떠올리면 내내 무채색이던 머릿속이 강렬한 색으로 가득 차고, 눈이 부시고 귀가 울리고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고, 황홀하고도 어지러워 나는 아픈 사람처럼 비틀거린다……. 이런 느낌의 책이다. 가장 아름다운 것을 원할 때, 치명적인 순수함에 사로잡히고 싶을 때, 그런 사랑을 느끼고 싶을 때, 나는 주저 없이 장 주네와 에밀리 브론테의 책을 펼쳐 든다.

  혼자 있을수록 생각은 많아지고 감정은 시시각각 변한다. 나는 내 감정을 달래주거나 증폭시키는 책을 골라 읽는다. 자신을 진단하고 처방전을 쓰듯. 그 처방전은 대개 효과가 있다. 나를 더 깊은 동굴로 들어가게 하는 책도 있고, 찬란한 벌판이나 해변으로 이끄는 책도 있다. 처방전에 쓰이는 책의 종류가 더 많아지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 이 정도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든다. 오늘 밤의 처방전은 고흐의 편지가 좋겠다. 그의 문장이 필요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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