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자의 서재

 
 

   가족, 세상이 험할수록 버팀목이 된다는 존재들. 요즘 시대에도 그럴까? 애써 키운 자식들을 시체로 맞아야했던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가족은 어떤 의미일까. 가족이니 내 일처럼 열심히 해달라는 소리를 듣다 하루아침에 경영상의 이유라며 해고되는 사회에서 가족은 어떤 의미일까.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대한민국에서 가족은 희망보다 한(恨)의 소재가 되기 쉽다.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성공보다 실패를 연이어 경험할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 가족은 희망고문의 다른 표현일 수 있다.

   천명관의 소설 『고령화 가족』은 “그저 위선에 가득 찬 역할극”에 지나지 않을 수 있는 가족을 노골적으로 다룬다. 실패한 영화감독과 양아치 형, 바람 잘 날 없는 여동생, 싸가지 없는 조카, 좌절된 욕망의 주인공 엄마, 다섯 명이 가족이란 이름으로 한 지붕 아래 산다. 핏줄로 계보를 따지면 너무 복잡해지는 이들에게 가족은 “같이 있을 땐 원수처럼 미워하다가도 막상 없으면 그리운” 연극과 같다.

   소설을 읽다 보면 “무슨 가족이 이래?”라는 생각이 절로 들지만, 하나같이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난 삶을 사는 이들에게 가족은 “한 명 더 들어와 산다고 이 집이 금방 무너지는 것도 아닌데”라며 비빌 수 있는 최후의 언덕이다. 하다못해 조카의 삥을 뜯으며 용돈벌이라도 할 수 있는 곳이다. 최소한 이곳에서는 맞아서 실려 나갈 순 있어도 영문도 모르게 죽거나 강제로 해고당할 가능성은 낮다. “부서진 희망의 흔적”일지라도 가족은 가족인 건가.

   최후의 희망 같지만 어떻게 보면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속담은 국가가 감당할 수 없는 ‘복지’를 대체해온 수단일지 모른다. 국가와 기업은 이를 활용해 자신들이 응당 맡아야 할 몫을 미뤄왔고, 『프레카리아트』를 쓴 야마미아 가린의 말처럼 국가와 기업이 가족을 강조하는 건 “가족을 과잉 인구, 즉 실업의 완충 지대”로 여기고 “충격 완화 역할”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싱글세’라는 해괴한 주장은 괴담이 아니라 국가와 기업의 속내일 수 있다.

   실패와 좌절의 쓰나미를 살짝 피한 중산층 가족의 분위기도 그리 다르지는 않다. 엄기호의 『단속사회』를 보면, 바퀴벌레 가족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저녁에 자식들이 거실에 모여 있다가 부모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나면 일제히 자기 방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풍자한 표현”이라는 바퀴벌레 가족은 『고령화가족』을 피해간 또 다른 가족의 현실이다. 이들에게 가족은 “같은 공간에 머물지만 서로 완전히 단절되어 있으며 어쩌면 무관한 관계에 가”깝다. 사실 우리에게 가족과 같은 느낌을 주는 건 피붙이가 아니라 취미나 성향을 공유하는 ‘공동체’인데, 같이 사는 건 별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힘없고 가난한 이들에게 가족이 거북이 등껍질처럼 눌러앉은 짐이라면, 힘있는 자들에게 가족은 ‘여전히’ 위기에 대처할 보증수표라는 점이다. 삼성가의 가계도를 그려보면 어지간한 대기업들이 혼맥으로 엮여 있다. 잘나가는 출판사들은 대부분 대를 이어 세습되는 가족기업이다. 그들을 묶어주는 건 무엇일까? 가족간의 우애? 사랑? 재산을 놓고 종종 벌어지는 법정다툼을 보면 그들에게 우애는 이익을 보장받기 위한 최소한의 합의에 그치는 듯하지만.

   얼마 전 국내 10대 재벌가문의 자산이 1,240조이고 지난 5년간 430조나 증가했다는 뉴스가 발표되었다. 이미 같은 가족이란 개념으로 묶이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어찌해야 좋을까? 부당한 짐을 지기보다는 개인으로 해체해서 기업과 국가에 몫을 요구할 것인가? 가족의 유지냐 해체냐, 라는 이분법을 벗어날 방법은 ‘다른 가족’을 구성하는 것이다. 어차피 혼자 살아남기 어렵다면 함께 힘을 모아야 하고, 그 함께함이 꼭 가족일 이유는 없지만, 『고령화 가족』의 주인공 오인모의 독백처럼 “나에 대한 기대가 부서져 산산조각난 뒤에도 그들은 나를 버리지 않았고 나 자신이 나를 포기한 뒤에도 그들은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연대는 쉽게 형성되지 않는다.

   2012년에 언니네트워크와 가족구성권연구모임이 주최했던 ‘정상가족관람불가展’ 사진전은 가족구성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다. 우리에겐 소위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뛰어넘어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존재와 살 권리가 있고, 이 권리는 타자를 배제하지 않고 환대한다. 복잡한 논리가 아니다. 내가 다른 존재에게 존중받고 싶듯이, 나도 타자를 존중해야 한다는 오래된 공리를 따르면 된다. 거기서부터 새로운 가능성이 시작된다.

   다만 『나는 천천히 울기 시작했다』는 산문집에 실린 박성대의 ‘소 이야기’라는 글에서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심성과 그 심성을 가능케 했던 배경의 상실을 본다. 서로 감정이 상한 뒤에도 “이 들 저 들 논배미 푸른 모로 다 채워지고 나면 마을 곗돈으로 묵도 하고, 잡채도 버무리고, 술 말도 받아, 온 동네 사람들 다 같이 느릅내 강가 버드나무 그늘로 나갑니다. 나가서 장구치고 노래하며 이런저런 마음의 앙금들 다 훌훌 강물에 흘려보내고 마주 보며 허허허 웃습니다.”

   웃을 수 없는 시대라면 지금의 가족은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울며 서로를 보듬어야 하지 않을까. 숨죽이며 고통을 삼켜야 하는 사람들 곁에서 지켜보고 듣고 그들과 함께 말하고 행동하는 존재, 이것이 가족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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