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 앞을 떠나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무덤을 바라보고, 쓸어보고, 끌어안고 하다가 종내, 그 무덤을 가슴에 담아버린 이들이 있다. 무덤을 가슴에 담으면 그 깊은 속에서 울리는, 무덤 속의 목소리를 안고 살아가야한다. 이론은 이를 트라우마라 부르고, 한국 땅에서는 이 주체를 ‘유족’이라 불러왔다. 무덤을 가슴에 안고 살아야하는 이들의 속내와 곡절을 탐구함에 있어, 박완서의 소설이 하나의, 영원한 원천이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는 세월이다. 『나목』 옆에 , 『소년이 온다』(한강, 창비, 2014)를 놓을 수 있겠다. 

   홀로코스트, 위안부 문제,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광주 항쟁, 세월호 참사에 이르기까지 작동하는 어떤 공통적인 문제 지점과 사유의 지점들을 『소년이 온다』를 앞에 놓고 생각해보고 싶다. 아니 『소년이 온다』를 단지 ‘올해의 소설’, ‘한강의 역작’으로 읽기보다, 학살과 기억과 글쓰기라는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인 문제틀의 차원에서 읽어나가는 연구 노트의 하나로 이 글을 쓰고 싶다. 그리고 그런 연구 노트를 부지런히 작성중인 여러분과 사유의 단초를 나누는 글이 되면 좋겠다.  

   상상하기 어려운 고통을 감내한 이들에 대해 동정이나 공감, 위로가 아니라, 모욕을 퍼부을 뿐 아니라, ‘네 고통이 진짜라는 것을 증명해봐’라는 식의 반응이 사회적으로 팽배하다. 헌데 이는 단지 세월호 유족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광주 항쟁 당시 학살 피해자들에 대해서도, 더 거슬러 올라가 한국 전쟁 당시 학살 피해자 유족에 대해서도, 또 일제 시기 강제 동원 피해자(특히 위안부)들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작동하는 반응 기제이다. 『소년이 온다』에서 ‘도청 진압’ 이후 체포된 이들에게 가해지는 ‘무자비한 폭력’은 고통의 맨얼굴을 보고야말겠다는 순수한 ‘사실 증명’의 의지의 결정체이다. 즉 고통을 ‘사실 증명’의 차원에서 입증해야만 타자의 고통의 강도를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은 고통의 맨얼굴을 보겠다는 의지이며, 이 의지는 순수한 폭력에의 의지라는 점에서 순정한 광기이다.

   『소년이 온다』를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프리모 레비, 이소영 옮김, 돌베개, 2014), 『나목』, 그리고 고통에 대한 사실 증명을 요구하는 무수한 말의 물살들과 대조해보면 또 다른 문제 지점이 대두된다. 나는 이를 ‘숭고함’에 대한 증오와 세속성에 대한 정당화라는 차원에서 생각해보고 싶다. 그러나 이를 어떤 일반적 원리가 아닌, 역사적 현상 즉 어떤 시기에 양자의 관계항이 변화되는 맥락 속에서 사유하고 싶다. 학살 생존자에게 가해지는 전도된 폭력은 어떤 점에서 학살을 견디고 살아남은 이들이 체현하는 ‘숭고함’을 견딜 수 없는 ‘시대정신’과 관련된다고 보인다. 초월적인 것과 내재적인 것, 숭고한 것과 세속적인 것에 대한 집단적 경도, 사회적 흐름은 그 시대의 정치적 지형의 추이를 살펴보는 중요한 바로미터이기도 하다. 세상의 모든 ‘숭고함’을 경멸하고, 모든 신성을 탈신화화 하는 일베의 카니발적 에너지가 ‘세속화’의 단계를 넘어 ‘고통의 맨얼굴’을 확인하는 광기로 이어지는 시대의 징후는 무수한 역사적 참조 지점을 대조하고 교차하며 사유할 필요가 있다.

   정동과 젠더 연구자 엘스페스 프로빈은 들뢰즈와 카프카와 프리모 레비를 경유하면서 수치와 죄의식과 글쓰기의 문제를 고찰한 바 있다.(Elspeth Probyn, “Writing Shame") “홀로코스트의 수치가 자신보다 오래 살아남는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준 프리모 레비”의 경험은 『소년이 온다』의 성희언니, 동호, 은숙이와 진수 그 모든 광주 학살의 생존자들에게서도 발견된다. 고문 기술자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최후의 항쟁 주체들의 고귀함을 무너뜨리려고 하고, 던져준 한 그릇 ‘먹이’ 앞에 동물처럼 무너지도록 유도한다.(프리모 레비는 이런 식의 폭력을 “쓸모없는 폭력”이라고 부른다.) 학살자, 고문기술자, 숭고를 모욕하는 자들이 부르짖는다. “너희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른 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었는지, 우리가 깨닫게 해주겠다. 냄새를 풍기는 더러운 몸, 상처가 문드러지는 몸, 굶주린 짐승 같은 몸뚱어리들이 너희들이라는 걸, 우리가 증명해주겠다.”(119)

   수치shame란 고트어의 Scham, 즉 “얼굴을 가림”이라는 말에서 왔다는 엘스페스 프로빈의 논의를 생각해본다. 수치를 모르는 뻔뻔스러움이 맨얼굴을, 헐벗은 몸뚱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임은 그런 점에서 흥미롭다. 『소년이 온다』의 동호는 그렇게 ‘얼굴을 가린’ 사람이다. 얼굴을 가리다, 결국 얼굴을 잃어버린 사람. 그것이 살아남았지만, 죽은 자, 무젤만의 다른 이름이리라. 학살 생존자들에게 수치라는 정동의 강도 역시 동일하지 않다. “우리들을 희생자라고 부르도록 놔둬선 안돼.”라고 되뇌며 분노의 힘으로 자기 존엄을 되찾아가는 생존자들의 모습 또한 『소년이 온다』에서 만나는 또 다른 얼굴이다.

   다른 한편 이 지점에서 수치와 모욕의 관계와 전도 양상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고 싶다. 왜 피해자를 부정할까?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서 프리모 레비는 이를 희생자와 압제자 사이에 놓인 역설적인 유사성이라는 차원으로 설명한다. “양자는 같은 덫에 걸려있다.” 레비에 따르면 “상처를 받은 사람은 고통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그 기억을 지우려는 경향이 있다. 상처를 준 사람은 그 기억으로부터 해방되고 자신의 죄의식을 덜기 위해 마음 깊숙이 그 기억을 몰아내버린다.” 달리 말하면 피해자를 부정하고, 상처를 모욕하는 것은 압제자의 마음 깊이 자리 잡은 죄의식 때문이다. 피해자에게 모욕을 가하는 것은 압제자의 죄의식의 전도된 형태이다. 하여 모욕은 더욱 잔인하게 가해진다. 폭력의 경험은 양자에게 모두 수치의 정동을 촉발한다. 하지만 압제자는 수치를 모욕으로 전도하여 공허 속에 불타오르지만, 희생자는 수치를 통해 다른 몸을 갖게 된다. 들뢰즈의 말을 빌자면 “수치는 그 사람을 확장시킨다.” 수치가 글쓰기가 되는 것이 희생자의 경우에 국한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글쓰기란 어떤 의미로든 희생자에게 속한다는, 글쓰기의 본원적 윤리성에 대해 생각하며 연구 노트를 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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