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커스단에서 ‘굶기’를 공연하는 카프카 단편소설의 <단식광대>. 곡기를 끊으면서까지 무엇을 끊으려는 것일까? 침묵 속에서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2014년 광화문에서는 수많은 단식광대들의 공연이 재현되고 있다.
 
  카프카의 주인공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거의 모두가 결혼 기피증자들, 불면증 환자들, 불안증 환자들이다. 그 공통점들 중에는 ‘굶기’도 있다. 카프카의 주인공들은, 심지어 동물들마저도, 거식증 환자들이다. 벌레가 된 그레고르 잠자도 결국에는 굶어죽고, 굴속에 들어가서 존재의 문제에 몰두하는 개도 단식을 하면서 생각에만 골몰한다. 하지만 이 굶기의 장인은 역시 카프카가 말년에 남긴 단편소설 <단식광대>의 주인공이다. 그는 서커스단에서 ‘굶기’를 공연한다. 철창 안에 앉아서 낮이고 밤이고 물 한 모금 안마시면서 사람들에게 굶는 자신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에게는 늘 불만이 있다. 그건 감시하는 사람들의 시선도 아니고 허기의 고통도 아니다. 그건 40일째가 되면 서커스 단장이 다음 공연을 위해서 그의 단식을 중지시키기 때문이다. 그는 더 오래 마음껏, 40일 너머까지 굶고 싶지만 그 소망은 언제나 금지 당한다. 날이 지나고 그의 공연도 시들해지자, 단장은 그를 동물 우리로 옮겨 놓고 까맣게 잊어버린다. 또 긴 세월이 지난 뒤에 우리를 청소하던 단장은 구석진 곳에서 아주 조그맣게 작아져버린 단식광대를 발견한다. 그는 여전히 굶고 있다. 단장은 묻는다. 너는 도대체 왜 굶는 거냐? 광대가 죽어가면서 대답한다. 나도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다고, 그런데 그 맛있는 음식을 찾을 수가 없다고…….

  이 맛있는 음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답을 주는 건 프루스트다. 그 유명한 마들렌 기억이 그것이다. 마들렌 빵 한 조각과 카모마일 차 한 잔이 구강 안에서 일으키는 기억의 향연, 프루스트가 무의지적 기억이라고 부르는 그 기적의 기억은 다름 아닌 카프카의 단식광대가 40일 단식 너머에서 찾아 헤매던 미지의 음식이다. 왜냐하면 비록 그 기억은 빵과 차의 삼투작용으로 일어나지만 사실은 굶기가 진정한 원인이기 때문이다. 마들렌 기억의 축제와 해후하기 전까지 프루스트는 거식증을 앓고 있었다. ‘과거는 허무하고, 현재는 삭막하고, 또한 아무런 희망도 없이 공허한 내일 앞에서’, 그렇게 뻔하고도 뻔하게 이어지는 삶 안에서 그는 생에 대한 아무런 허기도 식욕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거식증의 어느 겨울날, 또다시 우울한 산책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어머니의 강요를 못 이겨 빵 한 조각과 차 한 잔을 마셨고, 그리고 돌연하고도 온전한 기억의 귀환과 만난다. 그런데 그 기억은 왜 축제이고 기적일까? 그건 죽은 것들이 귀환하기 때문이다. 사라진 것들, 내 버린 것들, 망각된 과거의 존재들이 여전히 살아있는 것들로 현재의 공허한 시간 속으로 도래하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과거가 살아서 귀환하는 현재, 그 생생한 현재가 약속하는 새롭고 충만한 미래의 기쁨이 무의지적 기억의 황홀경이다. 이후 프루스트의 삶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우리는 잘 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삶과 단호하게 결별하는 새로운 삶, 코르크 방 안의 침대 위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완성되는 미래의 삶이다.

  프루스트의 사적이고 소설적인 기억을 역사적 정치적 기억론으로 바꾸어 사유한 건 벤야민이다. 그래서 과거의 시간과 더불어 현재 안으로 도래하는 건 프루스트에게 사물들이지만, 벤야민에게는 사람들, 죽은 사람들이다. 자살충동은 있었지만 벤야민에게 거식증이 있었는지는 분명찮다. 그러나 그의 철학은 단식의 철학이다. 그는 당시 모든 이들이 맛있는 음식으로 폭식하던 진보라는 음식을 단호히 거부하면서 미래라는 환영의 시간으로 공허하게 내달리는 현재의 기차를 급브레이크를 밟아서 정지시키려 한다. 대신 그는 과거의 시간 속으로 투신한다. 임종의 침대에 누운 사람의 눈앞으로 살아 온 과거들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가듯이, 헛된 미래로부터 해방된 기억 에너지는 제 갈 곳으로, 과거 속으로 역류한다. 그리고 미래의 이데올로기가 금기시 하는 40일 단식 너머 저편 망각의 영역으로까지 도착한다. 거기에서 기억이 만나는 것, 그것은 죽었으나 죽지 않고 살아있는 과거의 얼굴들이다. 억울하게 죽은 생, 부당하게 더 살 수 없었던 생들은 다시 살고자 한다. 그들은 세월로는 사라졌지만 역사로는 살아 있다. 희망은 미래에 있지 않다. 그 미래는 똑같은 과거가 반복될 뿐인 공허한 미래이기 때문이다. 희망은 과거 안에만 있다. 조작되고 은폐된 적폐들로 가득한  과거, 그 과거 안에서 부당하게 생의 권리를 빼앗긴 이들 ―희망은 이들에 대한 기억, 이들과의 연대 안에만 있다. 그래서 벤야민은 말한다: “희망은 희망 없는 것들 속에만 있다”라고. 그러나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또 이렇게 경고한다: “적들이 승리하면 우리도, 죽은 자들도 안전하지 못하다. 그러나 적들은 오늘도 승리하고 있다”

  적들은 어떻게 승리하는가? 어떻게 승리해왔고 또 오늘에도 승리하려고 하는가? 그건 망각이라는, 미래라는 이름의 사이비 음식을 통해서다. 과거는 지나갔다고, 이제는 잊어야 한다고, 그들은 말한다. 미래가 중요하다고, 그만 애도를 멈추고 다시 현실로, 미래를 위한 행진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거기에 우리가 찾는 맛있는 음식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그들은 우리를 내일의 희망 잔치로 초대한다. 그리고 혹자들은 그 미래의 맛있는 음식을 미리 폭식한다. 피자와 햄버거, 치킨과 맥주라는 성찬을 폭식한다. 망각과 미래의 입으로 과거와 기억들을 먹어 치운다. 그렇게 현재는 똑같은 적폐의 과거가 또 한 번 공허한 미래로 배설되는 하수구가 되고, 늘 승리해 온 적들을 위해 벌어지는 또 한 번 승리의 파티장이 된다. 그러나 그 폭식의 파티장 한가운데서도 단식은 이어진다.

  김영오 선생이 물러난 그 자리에서 단식은 멈추지 않고 여전히 이어진다. 음식을 끊으면서, 곡기를 끊으면서 이 분들은 무엇을 끊으려는 것일까? 그들은 침묵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는 이런 외침이 들리는 게 아닐까? “이제는 그만!”이라는 외침, “이런 현재, 그런 미래는 이제 그만 끝내자!”라는 외침이.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