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의 열정과 불안정성. 피에르 오그스트 코트(Pierre-Auguste Cot)의 작품 <봄>. 1873.
  니클라스 루만은 『열정으로서의 사랑』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사랑의 문제를 ‘불안정성’이라는 한 단어로 정리한다. 루만에 따르면 사랑에서 문제는 변하는 존재인 인간이 마찬가지로 변하는 다른 인간과 만나 변하지 않을 것을 기대하는 데서 발생한다. 현대인의 사랑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관계를 안정적으로 메어줄 외부의 지지대들이 사라지며 순수하게 개인의 인격적인 자원들로 이를 유지해야하기 때문이다. 이 진정한 자유연애의 세상에서 연인에게 더 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게 됐다고 말하는 것은 연애하는 자의 일종의 권리처럼 보인다. 한때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러나 더는 의미가 없게 된 그 자신 외에 어떤 것도 떠나는 이를 붙잡아둘 수 없다. 이렇게 언제 떠날지 모르는 타인에게, 몰두하는 동시에 안정성을 획득하는 불가능한 과제가 사랑의 핵심문제라는 것이다.

  유동성을 핵으로 하는 후기 근대에 이르러 사랑이 더욱 어려워지는 건 당연하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기존 근대 사회의 견고한 구조들이 해체되며 유동성과 불확실성이 증대되는 것을 후기 근대의 특성으로 꼽으며, 이러한 사회에서 개인들은 장기적인 전망을 가지기 어렵게 됨을 지적한 바 있다. 루만을 따라 불안정성의 감당을 사랑의 핵심으로 본다면 사랑이란 원래도 고통스런 것이건만, 개인을 둘러싼 세계의 유동성이 늘어나고 자본에 의해 그것이 적극 권장되는 시대인 바에야 더욱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방법은 두 가지다. 안정적이고자 하는 마음을 유동성에 적응시키고 훈련시키는 것, 언제든 떠날 수 있게 마음을 가볍게 유지하는 것이 첫 번째다. 2000년대 이후 관계에 있어 ‘쿨의 미학’이 보편화된 현상은 후기 근대의 날로 증대되어 가는 유동성에 사람들의 마음이 적응하는 방향으로 움직인 결과다. 두 번째는 사라져가는 지지대들에라도 스스로와 상대를 묶어, 허구에 불과한 안정성이나마 보장 받고자 하는 것이다. 결혼을 하는 것, 미혼의 연인들이 결혼한 부부를 흉내 내려하는 것, 끊임없이 말로써 서로에 대한 마음을 약속하는 것 등 둘인 상태에서 벗어나 하나가 되고자 하는 모든 운동들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방법도 완전하지 않으며 문제가 있다. 앤서니 기든스가 『현대 사회의 성·사랑·에로티시즘』에서 도래할 사랑의 상으로 점친 ‘합류적 사랑’은 도출된 맥락은 다르나 ‘쿨한 사랑’에 조응하는 측면이 있다. 기든스에 따르면 합류적 사랑이란 상대방에게 사로잡히는 대신 자아의 발전을 최우선으로 하며, 합일의 욕망에서 벗어나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는 사랑을 일컫는다. 이러한 사랑은 자아의 보존 및 운용이 주체의 최대 관심사가 되어 이를 위협할 리스크들(예컨대 사랑의 정열)을 일찍이 배제하고 관리하려는 신자유주의의 정신과 닮아 있다. 또한 상대의 선택을 언제나 존중하여 나를 떠나기로 선택하는 것마저 어떠한 요구 없이 수용할 수 있는 관계란 현실적으로 얼마나 가능할까. 기든스는 이러한 관계를 감당할 만큼 강하고 독립적인 개인을 요청하는 듯하나 이토록 나를 둘러싼 타자들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이란 시쳇말로 ‘멘탈갑’이라 해야 할 것이다.

  두 번째 방식은 사랑에 참여하는 존재가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인 한 애초에 불가능한 시도다. 순간의 합일은 가능하며 이를 반복적으로 추구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둘이 하나가 될 순 없기에 본질적으로 불안은 가시지 않고, 이러한 상태에서 끊임없이 합일을 추구하는 방식은 관계의 피로도를 증대시키기 마련이다. 합일의 극단적 추구는 끝내 사랑을 파괴할 수도, 끝끝내 삶을 파괴할 수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자살하는 정사(情死)는 지속될 수 없는 합일의 순간을 영원히 봉인하려는 시도다. 합류의 방식도, 합일의 방식도 이처럼 난망하기에, 루만은 다음과 같이 문제를 정리한다. “비극은 … 사랑을 좇아 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사랑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는 점에 있다.” 이 유동적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사랑해야 할 것인가?

  쉬이 결론을 낼 수 없는 문제지만, 주목하게 되는 것은 쿨의 방식이나 합일의 방식이나 그 기저에 놓여있는 것은 동일하다는 사실이다. 증대되는 유동성 속에서 사랑하는 이와의 안정성에 대한 욕망이 생겨나는 것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그것이다. 사랑하는 이와, 불가능성을 감지하면서도,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라게 되는 그 애틋한 마음을 너무나 알 것 같아서, 이 유동적인 세계에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의 행복과 고통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