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Art of Noise      <Who's afraid of>의 커버 아트
 
  단언컨대, ‘웰빙’이라는 말이나 ‘힐링’과 같은 언어는 20년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이물이다. 공적담론의 기본 검색 플랫폼인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를 검색해 보면 쉽게 확인 가능하다. 근래의 신종용어다. 대체 이 20년은 어떠한 시간이었나? 자본권력 독점과 사회/복지국가 해체를 핵심으로 한 신자유주의 지배의 역사가 아닌가? 그 폭력적인 시간 속에서  ‘웰빙’이니 ‘힐링’이니 하는 모순된 욕망, 역설적 언어들이 폭발적으로 융기한다.

  사실 자본은 언어와 주체, 문화를 발명하고 이를 통해 축적을 도모함으로써만 생존할 수 있다. 그리하여 1990년대 초반 신촌에 있던 한 백화점이 새로운 소비주체들을 호명·구성해 내기 위해 발명한 언어가 ‘미시족’이었고, 재벌 삼성의 계열 홍보회사가 중산층의 소비 주체화를 위해 창안해 낸 개념이 ‘와인족’이었다. 이를 이어, 소비자본 시장 참여의 주권을 갖춘 개인들이, 부재한 국가를 대신해 자신의 복리를 스스로 관리·경영·개발해 나가도록하는 신자유주의 주체화 양식, 바로 그게 ‘웰빙족’이지 않은가?

  해체된 사회의 불안한 개인들이 공급받는 우울증 치료제가 또한 ‘힐링캠프’다. 위선의 힐링. 쉽게 해소되지 않을 불안,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쾌락을 ‘힐링’으로, ‘웰빙’으로 치유 받는다. 노동하는 프롤레타리아들에게는 지옥 같은 현실로부터 분리된 채, ‘쓰레기가 되는 삶’ (바우만) 혹은 ‘벌거벗은 삶’ (아감벤)이라는 표현이 더 이상 과장이지 않은 잡리스·홈리스 잉여들의 자멸하는 실재계로부터도 소외된 채.

  요컨대 정신 ‘힐링’과 신체 ‘웰빙’의 주도적 담론은 신자유주의가 초래하고 자본국가가 방기한 생활의 위기, 문화의 불안, 사회적 공포의 희비극적 증표에 다름 아니다.

  현실의 사태에 대해 그 어떤 진지한 발언과 비판·성찰의 담론을 내놓지 않으면서, 공영방송과 지상파TV, 종편과 케이블 그 무수한 채널들이 ‘웰빙’과 ‘힐링’을 쏟아낸다. 현실의 모순을 강화하고 모순의 현실을 유지하는 채널이 유출하는 ‘웰빙’과 ‘힐링’들은 그래서 수상쩍고 불길하다. 실제와 무관한 외설적 한담, 현실을 은닉하는 허위적 스펙터클. 노동자 빈민들조차 이러한 프로그램을 쫓는 것은, 크라카우어의 말을 빌리자면, 신자유주의 박탈의 시대 일종의 ‘대중장식’이진 않은가? 그 장식의 성찰적 이해는 래디컬하게 신자유주의자본국가의 지배양상에 대한 비판적 조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발음조차 제대로 되지 않던 ‘세계화’를 들먹였던 YS정권의 신자유주의 경제학은 ‘IMF’ 파동으로 처참히 몰락했다. 이를 뒤치다꺼리해야 했던 DJ정부는 결국 초국적 자본 주도의 시장개방과 구조조정, 사사화의 신자유주의 극약처방을 강제 투약했다. 신자유주의 탈취의 정치경제, 생계위기·생명위협의 사회문화는 이후 쭉 지속되었다. 한미자유무역협정을 서두른 노무현 정권, 토건재벌공화국의 꿈꾼 이명박 정권, 그리고 ‘4대악’도 모자라 규제 자체를 악으로 단정하고 그에 대한 전쟁을 선포한 박근혜 정권 모두가 차이 나면서도 공통된 신자유주의 지속의 권력에 해당한다.

  공공적이고 사회적이며 정치적이고 그래서 문화적이고 또한 경제적인 조건들을 이 땅에서 구조적으로, 체계적으로 삭제시킨 레짐의 연속. 그 위기의 역사를 반영하듯, 20년 채 못 되어 공적인 영역으로서의 공영방송은 사실상 몰락했다. 정치적 실천으로서의 TV저널리즘은 죽은 것과 다름없다. 반면에 대중매체,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웰빙’의 건강성 코드와 ‘힐링’의 위안적 수식이 판을 친다. 그러하니 어찌 붕괴된 미디어생태계의 뒤틀린 반문화가 아니겠는가? 해고되는 노동자, 자멸하는 빈민들, 희망 없는 잉여들이 늘어나는 시간에 태평스레 지켜보고 행복하게 소비하며 한가하게 즐기기만 할 대중문화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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