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의 무능력과 새로운 미디어 현상의 도래

  지난 10월 4일 푸른역사 아카데미에서 열린 서평회에서 『전후라는 이데올로기』(현실문화, 2013)의 저자 고영란 선생님(니혼대 문리학부 국문학과 준교수)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눴다. 3·11(2011년 발생한 일본 대지진)과 일본 사회의 변화에 대한 여러 가지 사례를 들을 수 있었다. 2011년 이후 일본 대중잡지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메이저 신문과 방송은 원전 문제를 비롯해 문제적인 정치 현안을 제대로 보도하고 있지 않다고 한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미디어가 문제다. 그런데 뜻밖에도 일본의 여성잡지와 대중잡지가 메이저 미디어가 하지 않는 정치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고 한다. 원래 하던 장단이 아니라서 더 뜻밖의 현상이다.   고영란 선생님이 예로 들어주었던 『주간 플레이보이 週刊プレイボ―イ』를 찾아봤다. 서평회에서 제목만 들었을 때는, 펜트하우스 플레이보이의 일본판인 줄 알았다. 하지만 『주간 플레이보이』는 펜트하우스와 관련이 없는 매체다. 1966년에 창간해 지금까지 이어졌으니 역사도 상당하다. 가격은 340엔. 한국 돈으로 3,700원쯤 하는 그렇고 그런 잡지다.  이 잡지의 최신호인  2013년 40호(10월 14일)의 목차를 살펴보니, 아베 정부의 소비세 증세를 비판하는 기사가 특집이었다. 홈페이지에 가면 역대 『주간 플레이보이』의 표지와 목차를 찾아볼 수 있다.(http://wpb.shueisha.co.jp) 2013년 9월호의 「후쿠시마 현지 르포, 거짓 제염은 이제 됐어! ‘福島現地ルポ’ ?りの除染はもういい」도 일본의 메이저 미디어가 다루지 않는 충격적인 기사다. 40호(10월 7일)에서는  정부의 소비세 인상 논리를 비판하는 기사가 실렸다. 이 역시 특집이다. 「철저검증! 아베 총리의 거짓말 전설 徹底檢?! 安倍首相の ‘ウソつき??’」이라는 솔깃한 기사도 있었다. 계속해서 과월호의 목차를 차례로 찾아봤다. 28호(9월 23일)와  29호(9월 30일)에선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대한 비판 기사가 실려 있었다. ‘TPP’라는 용어는 한국 사회에선 낯선 말이다. 미국을 주도로 12개 나라가 참여하는 다자간 지역경제통합 체제인 ‘TPP’는 ‘FTA’의 끝판왕이다.  이 잡지가 원래 이런 기조였던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특집 기사 몇 꼭지 외에는 AV 배우로 데뷔하는 소녀의 수줍은 인터뷰라는 식의 살색 만발한 사진과 기사가 가득하다. 인터뷰가 순 이런 식이다. “히프가 참 훌륭하시네요.”, “오호호, 감사해요.” 2011년 이전에는 더 했다. 가장 좋아하는 섹스, 절대 싫은 섹스 앙케트. 이런 게 특집이었다. 3·11을 며칠 앞둔 2011년 3월 7일 발행호까지도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정치 경제와 관련된 민감한 내용이 본격적으로 특집에 반영되고 상당한 분량을 할애받게 된 것은 2011년 4월 11일 발행호부터였다. 동일본 대지진, 도쿄 전력 비판, 원전 수습 문제, 이재민 구호 기금 사기 문제 등등 분량부터 이례적이다.  『주간 플레이보이』가 개과천선해서 정치적으로 올바른 매체를 만들고 있는 건 아니다. 대중이 읽고 싶어하는 기사를 내보내는 게 대중잡지의 당연한 생리다. 3·11 이후 일본 대중은 급격하게 정치화되고 있고, 이런 잡지조차 대중의 변화된 관심사를 기민하게 쫓지 않을 수 없다. ‘비키니와 함께 후쿠시마를! 섹스와 함께 소득세 개정을!’ 현실 직시와 현실 도피의 양축이 이 잡지의 목차에 반영돼 있다.  3·11 이후 『주간 플레이보이』 독자의 머릿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고영란 선생님의 설명에 의하면 『주간 플레이보이』뿐만 아니라 여타의 대중잡지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메이저 미디어는 정부의 보도 통제에 묶여 새로운 트랜드를 적극적으로 반영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래서 상수도에서 흘러야 할 기사가 하수도에서 유통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한국만 하더라도 당연히 저녁 9시 뉴스에 나와야 할 이슈를 팟캐스트로 들어야 하는 상황이지 않은가!  일본 사회의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자민당은 선거에서 압승을 거둘 수 있었던 걸까? 코앞으로 다가온 평화 헌법 개정은 어찌 된 영문이며, 후쿠시마 사태 해결에도 어쩌면 그렇게 무능 무력한 걸까?  일본 사회는 변화를 바라기엔 이미 너무 늦은 게 아닌가 싶다. 변화의 징후는 여기저기서 감지되지만, 실제 변화는 요원하기만 하다. 악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남말할 때가 아니다. 한국은 어떤가? 한국 사회가 최악의 파국에 처하기 전 되돌릴 수 있는 시간이 아직 남아 있을까? 어제 혹은 엊그제, 모두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을 뿐 이미 오래전에 되돌아갈 수 없는 나락으로 굴러떨어진 게 대한민국이 아닐까? 현실을 부정하고 싶을 때 우리는 어디로 무엇에 고개를 돌리고 싶을까?  덧붙여 며칠 사이에 있었던 연예계의 해프닝에 대해 생각해본다. 예쁘고 가창력까지 뛰어난 한 여가수의 알몸사진이 인터넷에 유출됐다. 같은 날 유명 연예인들이 불법 도박 혐의로 줄줄이 검찰에 불려 나갔다. 전 법무부 차관이었던 자의 ‘별장 성 접대’ 혐의에 대해 검찰이 무혐의 처분을 내린 게 공교롭게도 같은 날의 일이었다. 그런데 파파라치 특종 사진으로 악명이 높은 디스패치가 뜻밖의 기사를 낸다. 무혐의 수사 발표에 맞춰서 연예인 불법 도박사건 관련 정보를 흘린 게 검찰이라는 지적이었다. 여가수 나체사진 유출에 대해서도 자신들과 거래를 시도했던 자의 녹취록을 공개하면서 불법적인 사진 거래는 하지 않는 디스패치의 상도의를 은연중에 과시했다. 디스패치의 이날 활약에 대해 한 트위터 사용자는 이런 글을 올렸다. “디스패치가 이렇게 참언론이었다니.” 수천 명이 이 글을 리트윗했다. 우리를 둘러싼 미디어 환경의 천박 단순함이 이 소동에 한꺼번에 집약되어 있다.  정부 정책 비판부터 탈핵과 신자유주의 비판, 불법 유출된 누드 사진에 이르기까지 온갖 뉴스가 소용돌이치며 대량 생산되고 있지만, 많은 뉴스 소비자가 뉴스를 소비만 할 뿐이다. 또한 뉴스는 뉴스에 떠밀려 제압되고 소멸한다. 이런 미디어 환경에서 대중은 자극적인 뉴스에 쉽게 흥분하고 빨리 잊어버리는 습성에 길들고 있다. 플레이보이와 디스패치가 언론답다는 소리를 듣는 세태에 따져봐야 할 것은 참언론의 부재인 것만이 아니다. 자본과 국가 권력에 장악된 미디어 환경을 향한 전면적인 비판과 투쟁이 없다면, ‘참언론’이란 말은 웃기도 울기도 애매한 농담이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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