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의 19번째 영화 <뫼비우스>

 
 
     
  김기덕의 영화는 쉽지 않다. 물론 텍스트의 해석적 난이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어려움이란 그의 영화가 영화와 관객 사이에 관습적으로 확보된 거리를 무시한 채 확 찌르고 들어오는 데서 비롯된다고 생각된다. 부정적인 의미로든, 긍정적인 의미로든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극장 좌석에 편안히 앉아서 관람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언제나 등 뒤로 뿌듯하게 느껴지는 소파의 감촉을 느끼면서 스크린 안쪽 공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란에 비해 안온한 여기, 지금의 자리를 새삼스레 확인하며 관람할 수 있는 여느 영화와는 다르다. ‘영화’ 자체가 갖고 있는 의미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해야 할 뿐만 아니라, 김기덕의 이름으로부터 강요되는 의미의 강박에 시달려야 하고, 영화가 끼치고 있는 불편함과도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 영화를 보는 행위가 이 정도로 고행이라면 애초에 영화를 보는 의미란 무엇인가 처음부터 다시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영화를 하나의 문화상품으로서 간주하여 자본에 종속되는 거대한 시스템으로 이해하는 차원에서든, 영화를 기호학적인 도상들의 체계로 간주하여 일종의 소통행위로 이해하는 차원에서든, 영화를 만들고 관객이 그것을 보는 일련의 행위에 부착되어 확정된 관습을 만들어내는 것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투여되는 어려운 작업이라면, 그 반대로 확정된 관습을 통어하면서 그것의 불일치를 이끌어내는 힘 역시 쉽지 않다. 김기덕 영화의 힘은 분명 그곳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로 만들 수 있을까 싶은 날 것 그대로의 추상적인 개념을 영화의 시각적 질감을 통해 표현하는 것, 하지만 철학이나 문학처럼 개념을 언어적 대상으로 다룰 수 없는 영화라는 매체의 숙명이란 원래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납득해버리게 만드는 것까지 말이다.  김기덕 감독이 19번째로 만든 영화인 <뫼비우스> 속의 세계는 고요하다. 이 영화가 무성으로 되어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이 영화가 일종의 마치 추상성의 진공 상태를 이루고 있는 까닭일 것이다. 이 때문에 ‘소리’와 같은 감각적인 구체의 질감들은 자연스레 훼손되고 있는 것이다. <뫼비우스>의 세계 속에 등장하는 성기절단이나 근친상간 등의 충격적인 사건들은 실제 일어난 사건인지, 감독이 전달하고자 하는 추상적 개념에 대한 영화적 메타포인지 분명히 알 수 없을 만큼, 그 경계를 아슬하게 오가고 있다. 성질이 급한 관객이라면 겉으로 드러난 사건의 충격성만으로도 깜짝 놀라버리겠지만, 느긋한 관객이라고 해서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실제의 모든 사건들을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같은 정신분석학적 관념의 영화적 메타포에 불과하다, 라고 간주해버리고 안심할 수만은 없게 된다. 무엇보다도 영화 속에 존재하는 감각적 이미지의 다발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가 참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구체적인 현실의 맥락들을 환기하도록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라는 텍스트 속에서 구체와 개념 사이의 경계를 의미하는 봉합선을 감지할 수 없다는 것은 이만큼이나 어렵고 모순적인 교착상태를 만들어낸다. 차라리 꿈과 현실 사이의 어렴풋한 경계라는 것은, 오히려 이해하기에 손쉬운 것이 아닐까.  이 영화의 제목 <뫼비우스>는 길죽한 띠 모양의 종이를 한 번 꼬아 붙여 만드는 뫼비우스의 띠로부터 따 온 것이다. 이 띠는 2차원 도형이지만, 단지 한번 꼬아 붙이는 것만으로 3차원에서 구현된다. 즉 2차원 평면에 존재하는 존재가 그 차원을 훼손하지 않고 한 차원 위의 3차원 공간을 경험할 수 있는 도형이 바로 뫼비우스의 띠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뫼비우스의 띠를 2차원 속에 위치해 있는 존재가 3차원을 경험할 수 있는 신기한 유희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은 이를 외부의 3차원 공간 속에서 바라보고 있는 관찰자의 입장일 때뿐이다. 뫼비우스의 띠 안에 존재하는 2차원의 주체들은 좁고 길고 그다지 평평하지도 않은 평면 위를 끊임없이 달려가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좁고 긴 길은 영원에 가까울 만큼 반복적으로 이어진다. 길이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만큼 그 길을 걸어야 하는 사람에게 공포일 것이 또 있을까. 마치 우리들의 삶처럼, 인간이 하나의 차원에 계속하여 머무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수많은 모순들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크레타인의 역설’이나 ‘러셀의 역설’이 애초에 역설인 것은 그것에 어떤 단일한 차원, 예를 들어 N의 차원에서 발생한 모순이라 같은 차원 내에서는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N+1차원에서만 해소될 수 있는 것이다. 아니, 해소된다기보다는 오히려 망각되는 것이다. 따라서 2차원의 단일한 평면을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 속의 인간에게 있어서는 이 모순은 끊임없이 안고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짐과 같은 것이다. 이 뫼비우스의 띠가 이를 옆에서 지켜보는 3차원의 인간, 혹은 관찰자, 혹은 관객에겐 유희일 것이나, 그 속에 치열하게 존재하며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2차원의 인간들에겐 단순히 지옥에 다름 아닐 것은 이 때문이다.  영화 <뫼비우스>의 세계 속에 존재하는 인간들은 여느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2차원의 좁고 긴 길을 끊임없이 걸어가고 있다. 아버지는 바람을 피우고, 그 때문에 정신적 충격을 겪은 어머니는 아들의 ‘남근’을 거세해버림으로써 가족의 삼각형 한쪽이 무너진다. 이 ‘남근’이 실제의 성기가 아니라 일종의 남성성의 메타포임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뫼비우스> 속에서 김기덕 감독은 그것을 실제로 표현해 버린 것이다. 말하자면, 압도적인 감각의 구체와 근근한 개념 사이. 성질 급한 관객이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하다. 메타포라고 속 편하게 이해하기에는 그 이미지가 너무나 구체적인 까닭이다. 아버지는 죄책감에 아들의 ‘남근’을 재생하고자 애쓰고, 결국 자신의 것을 아들에게 이식하기에 이른다. 이로써 다시 삼각형의 균형이 회복된다. 어머니가 돌아오는 것이다. 하지만 이 푸른 옷의 어머니가 이전에 아들의 ‘남근’을 거세한 그 어머니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자리’만을 가리킨다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하다. 단지 거세의 대상과 욕망이 자리를 바꾸었을 뿐인 것이다. 이렇게 계속해서 반복되는 욕망의 불일치와 자리바꿈이 가족 제도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모순적 드라마를 구성하고 있다. 그렇게 영화는 끝난다. 하지만 그 뫼비우스의 공간을 바라보고 있는 여기 관객의 자리는 남았다. 영화는 뫼비우스라는 위상수학적 곡면이 그러하듯 3차원에 속해 있는 인간에게는 단순한 유희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그것은 안온한 관객의 자리에 침입하여 그 존립마저 위협할 것인가. 그것은 김기덕이라는 이름에 대한 맹목적인 열광이나 냉소를 넘어서는, 이해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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