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기세로 천만 기록을 갈아치운 <7번방의 선물>을 두고 몇 가지 잡음이 있었다. 대략적인 요지는 이 영화가 과연 천만 영화에 어울리느냐는 것. 천만 영화의 자격 같은 것이 따로 있을 리 만무하지만 관객에게 사랑받은 정도에 비해 영화에 대한 평가가 박한 건 사실이다. 영화의 만듦새는 썩 나쁘지 않았음에도 잘해야 200~300만 영화에 어울리는 영화라는 게 업계의 중론이었고 많은 평자들은 이토록 무난한 영화에 왜 이토록 많은 관객들이 열광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했다. 대상에 있지도 않은 잣대를 들이대 줄 세우기를 하는 논리에 동의할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하나는 맞는 것 같다. <7번방의 선물>은 잘해야 300만 정도의 영화였다.

이는 자격의 문제가 아니라 목표의 문제다. <7번방의 선물>은 참 잘 만들어진 상업영화다. 관객의 마음을 어르고 달래고 놀래키고 심지어 윽박지른 끝에 결국엔 바라던 눈물을 쥐어 짜낸다. 이를 두고 비평적인 관점에서 신파의 과잉이라 평할 수는 있다. 그러나 신파적이라서 고급스럽지 못하다고 하는 건 가치판단의 문제에 불과하다.

상업영화의 관점에서 봤을 때 <7번방의 선물>이 보여준 통속성은 전략적인 기획의 결과물이다. 요컨대 다르게 만들 수 없어 이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이것이 최대 다수를 만족시킬 방향이라는 판단 하에 이루어진 판단이란 말이다. 흔히 ‘상업’이라는 말에 비루하고 천박한 것, ‘예술’이라는 말에 고귀하고 가치가 있는 것이란 인식이 깔려 있는데 설사 대부분의 경우 이 말이 옳다고 백 번 양보하더라도 맥락을 무시한 적용은 반드시 오류를 낳기 마련이다. <7번방의 선물>의 경우가 그렇다.

이 영화는 애초에 대단한 예술적 야심을 성취하고자 하는 영화가 아니다. 허용 가능한 예산의 범주와 확보 가능한 상영관, 그리고 휴먼드라마의 장르적 잠재력을 고려한 경험적인 수치를 기준으로 최대 다수의 만족을 목표로 한 영화다. 그 결과 제작사 측에서 목표로 잡은 수치가 300만 남짓이었고 결과는 그 이상으로 잘 나왔다.

즉 예상을 넘어선 700만 명의 관객에 대해서는 영화 바깥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밖에 없다. 이런 저런 가설들이 제시되었지만 흥행한 영화의 이유를 두고 왈가불가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는 것이 충무로의 속설 중 하나다. 그럼에도 나는 <7번방의 선물>에서 한국사회에 불어 닥친 힐링 광풍의 그림자를 본다. 얼마 전부터 방송은 물론 영화, 책 등 각종 문화상품들이 온통 힐링 코드로 도배 되어 있다. 당장 힐링을 하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광고를 봇물 터지듯 해대고 너도 나도 멘토와 인생의 스승을 자처한다. 고백하자면 나는 이 풍경이 무섭다. 아니 애초에 힐링의 정의가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몇 가지 솔루션과 몇 권의 책, 눈물을 자아내는 영화를 보고 나면 모든 아픔이 사라질 거라 말하는 입들이 숨 막힌다. 단 몇 푼의 돈이면 손쉽게 ‘힐링’이라는 만병통치약을 살 수 있다는 상품들 위로 중세시대 면죄부가 겹쳐 보이는 건 과한 우려일까. 이쯤 되면 상업적 선택을 넘어선 강박이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다. 정확히는 강박을 판매한다. 각종 매체들은 누군가의 상처를 억지로 끄집어내거나 심지어는 있지도 않은, 니가 모르는 상처가 있다고, 마치 유명한 역술인이 지례 짐작하는 것처럼 최면을 걸고 협박을 해댄다. 이를 영화에 한정해서 이야기하자면 어느 순간부터 많은 관객들이 영화표 값이 아깝지 않을 만큼 웃고, 울고 나와야 한다는 강박에 빠져있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 흥행가도를 질주하던 한국영화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중간은 없다.   

아마도 <7번방의 선물> 이후 한동안 가족휴먼드라마를 표방한 영화들이 쏟아질 것이다. 어쩔 수 없는, 혹은 당연한 자본의 속성이다. 물론 당장은 아닐지 모른다. 영화계의 흐름이라는 게 제작 일정 상 늘 한 박자 늦게 찾아오는지라 빨라도 올 하반기 즈음이 될 공산이 크다. 시류에 맞춘 기획영화들이 잘 되고 안 되고를 떠나 나는 이런 흐름이 걱정스럽다. 다양성을 지켜야 한다는 원론적인 차원의 걱정이 아니다. 그저 힐링 영화들로 힐링이 되지 않기 때문에 토로하는 답답함이다. 힐링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이다. 영화 속 무언가에 감응하여 일어나는 과정이지 결과물로 배당받는 감정이 아니란 말이다. 하지만 일련의 힐링무비들은 힐링을 판매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영화 자체의 재미를 논하기 이전에 그 같은 과잉이 못내 불편하다. 화학조미료를 잔뜩 넣은 ‘엄마손 된장국’을 사먹는 느낌이랄까. 그런 의미에서 가족의 달을 맞아 찾아온 몇 편의 영화들에 눈길이 간다.  

이경규가 제작한 <전국노래자랑>은 엄청난 홍보 물량 공세로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이 영화의 홍보과정은 앞서 말한 힐링에의 강박을 쏙 빼닮았다. 이해는 가지만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영화 외적의 요란스런 부분을 덜어내고 봤을 때 이 영화는 의외로 만족스럽다. 포인트는 ‘의외로’다.

 
 
   △ 이경규가 제작한 영화 <전국노래자랑>
   
 
<전국노래자랑>은 <7번방의 선물>과 다름없는 상업기획영화다. 설정된 장르 형식을 갖추고 원하는 목표를 공략한다. 그러나 이 영화의 속살은 의외로 담백하다. 억지 눈물, 억지 설정을 최대한 자제하는 느낌이다. 한 발만 더 나가면 눈물이 쏙 빠질 것 같은데 그 지점에서 발을 뺀다. 결과적으로 그 신중함이 웃지 않아도, 울지 않아도 좋을 편안함을 주는 셈이다. 넘쳐나는 힐링 강박 속에서 눈치 보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속도로 걸어간다는 점이 숨 막힐 듯한 한국영화 속에서 한 박자 쉼표처럼 다가온다. 당연한 것임에도 최근의 영화들과 비교하면 유독 도드라지는 부분이다. 익숙하지만 푸근하고 소소하지만 정겹고 빤하지만 짠한 건 그런 까닭이다.

비록 천하무적 <아이언맨3>의 독주에 밀려 기대만큼의 흥행성적을 내진 못하고 있지만 그래서 더 칭찬해주고 싶다. 이 시점에서 <전국노래자랑>과 비교하고 싶은 영화들은 열 번의 훈계보다 한 번의 포옹이 더 가치 있음을 일깨워주는 <라자르 선생님>이나 가장 낮은 자리에서의 육체적 연대로 우리의 가슴을 뒤흔드는 <러스트 앤 본>같은 영화들이다. 포장된 선물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내 발로 찾아가서 교감하는 ‘힐링’의 기본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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