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분짓기는 영화들을 상업영화시장에서 밀어내기 위한 명분으로 작동한다.

 
 
   △ 영화 <지슬> 10만 관객 돌파...다양성 영화의 기적
   
 
만약 우리 몸에서 이름표를 붙이기에 가장 알맞은 자리를 한 군데만 고르라면 그건 아마도 각자의 이마일 것이다. 대개 이름이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본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며 스스로의 본성을 표현하기 보다는 타인의 시선을 위해 맞추어진 틀에 가깝다. 다시 말해 이름의 본질과 기준은 외부에 있다. 이름이라는 틀을 기준으로 대상을 판단하는 건 쉽고 편하지만 때론 대상의 본질을 놓치거나 왜곡하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이를 테면 소위 ‘예술영화’라는 표현이 그렇다.

예술영화라는 단어에는 다양한 집단의 복잡한 욕망이 섞여 있다. 어떤 이가 예술영화를 상업영화의 두루뭉술한 반대 개념으로 이해할 때 누군가는 보호, 육성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예술’이란 가치에 방점을 둔다. 누군가에겐 그저 지루하고 재미없는 영화를 부르는 이름일 뿐이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지게끔 생각을 도와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모두가 같은 단어를 쓰고 있음에도 실상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정반대의 사례도 있다. 모두가 다른 이름으로 부르지만 실상 모두 같은 영화들을 두고 이야기하는 경우다. 예를 들어 누군가는 예술영화, 정권이 바뀐 후에는 다양성영화, 어떤 단체에서는 독립영화, 제작자들끼리는 저예산영화, 언론에서는 비상업영화라 부르지만 사실 모두 같은 영화를 두고 하는 말인 경우가 있다. 각 단체의 목적과 입맛에 따라 원하는 이름을 붙이곤 하지만 정작 그 이름에는 해당영화의 실체가 없다. 남는 것은 서로의 욕망뿐이다.

하지만 어떤 영화를 어떤 이름으로 부르는지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보는 것이 도움이 되는 지점도 있다. 해당 영화를 둘러싼 각 집단의 목적과 욕망을 짐작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최근 멀티플렉스의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교차상영 배정으로 피해를 본 민병훈 감독의 <터치>(2012)의 경우를 살펴보자. <터치>는 명백한 상업영화다. 이 영화를 두고 예술영화라 부르기는 어폐가 있다. 비상업영화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저예산영화라고 할 수는 있겠다. 일부 제작자와 극장 입장에서 봤을 때 <터치>는 쉽고 친절한 영화는 아니고 왠지 좌석점유율도 높지 않고 따라서 수익률도 낮을 것 같다. 이것은 증명된 사실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믿음 혹은 짐작에 불과하지만 사실 정책의 방향은 확실한 근거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결국 <터치>는 상영 둘째 날부터 교차상영을 시작하더니 대부분의 상영을 오전 시간대에 배치 받았다. 관객이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구조를 만들어 놓고 좌석점유율이 낮다는 이유로 상영관을 줄인다. <터치>의 감독은 이 같은 불공정한 상영관 배정에 반발하여 영화진흥위원회에 이의제기를 신청했다. 이후 극장들은 이 영화를 어떻게 분류할까 고민하다 다양성영화라고 부르기로 한다. 실제로 <터치>와 비슷한 과정을 겪은 많은 영화들이 다양성영화관에서 상영된다.

이름이란 무서운 것이다. 붙여지는 순간 위치와 역할이 지정되어 버린다. 다양성영화라고 이름 붙는 순간 보호해야할 좋은 영화, 규모가 크지 않지만 가치 있는 영화라는 성격이 부여된다. 실제로 다양성영화관에서 상영관을 배정받을 수도 있고 각종 지원과 해택이 따라오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긍정적인 듯한 이 표현이 붙는 순간 ‘상업적이지 않은’ 혹은 ‘대중성이 부족한’이란 낙인도 함께 뒤따라온다. 언뜻 보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단 구분부터 짓고 그 안에서 따로 경쟁을 시키는 것이다. 이 같은 분류와 육성, 보호 정책이 전부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다. 분명 큰 영화들과는 따로 떼어내 지켜야할 영화들도 있다. 취지는 나쁘지 않다. 다만 이 같은 구분은 언제든 악용될 소지가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컨대 현대 한국영화판에서 다양성영화라는 인식이 박히는 순간 그 영화는 다양성영화끼리 경쟁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인다. 김기덕 감독이 일침을 날리며 문제가 되었던 <광해>의 스크린 독점 문제를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일차적으로 볼 땐 <광해>라는 거대한 영화로 인해 <피에타>와 같은 작지만 의미 있는 영화들이 관객과 만날 기회를 잃는 것 같다. <광해>가 강자고 <피에타>가 약자다. 틀린 건 아니다. 하지만 다양성영화들끼리 경쟁했을 때는 <피에타>와 <광해>가 다를 바 없다. 일반상영관에서 밀린 <피에타>가 다양성영화 전용관 혹은 그에 해당하는 스크린을 배정받는 동안 여타 다양성영화들은 <피에타>에 밀려 차례를 기다려야 한다. 큰 싸움에서 떠밀려  온 녀석이 골목대장 노릇을 하는 꼴이랄까. 떠밀려 온 놈도 답답하겠지만 골목에서 놀 수 없는 아이들은 죽을 맛이다. 물론 <피에타>의 잘못은 아니다. 한국영화 육성보호 정책이 이처럼 불합리한 그늘을 쉽게 만들만큼 허술하다는 말이다.

우리가 소위 쉽게 ‘예술영화’라 칭하는 부류의 영화들은 사실 그 실체가 없다. 아니 없다기보다는 영화 자체가 끊임없이 변하고 있으며 다양한 속성을 동시에 지닌다. 이름은 대상에 대한 하나의 속성이자 설명일 따름이지 분류의 기준은 아니다. ‘예술영화’를 만드는 이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영화가 예술영화라 불리는 것에 반대하는데 예술이라는 표현 앞에는 ‘대중적이지 않은’이라는 부정적인 의미가 생략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장르의 부정적인 사용법과 같다. 애초에 장르란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사용되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관객을 밀어내는 작용을 한다. 예를 들면 공포영화라고 알려지는 순간 공포영화를 싫어하는 관객들을 일단 배제하는 것이다. 예술영화, 비상업영화, 다양성영화 무엇이라 부르건 이러한 구분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 이름들은 어느 순간부터 이 영화들을 상업영화시장에서 밀어내기 위한 명분으로 작동하고 있다. 구분이 나쁜 것이 아니라 사용이 문제다. 영화가 담고 있는 다양한 요소, 다양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것이야말로 ‘다양성영화’의 진짜 의미이며 올바른 사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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