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이다.” 윌리엄 깁슨(William Gibson)이 1993년 라디오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언급한 이 표현은 최근 한 대선 후보의 출마선언문에 인용되면서 우리 사회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윌리엄 깁슨의 말은 출마선언문이 발표되자마자 각종 보도매체와 SNS를 통해 확산되었고, 화자와 화자의 저술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곧 책 판매량으로 이어졌다. 말하자면 첨예한 현실정치의 한 가운데서 80년대 하위문화의 일종인 ‘사이버 펑크’문학이 다시 등장한 것이다. 보기에 따라선 정치와 사이버펑크적 비전의 결합을 의미하는 이 현상은 새로운 정치관행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동시대 문화형식과 관련하여 중요한 논의를 내포한다.

진보와 보수의 가치가 상충하는 정치적 현실과 마찬가지로 문화와 예술적 실천 또한 새로운 것과 낡은 것의 경쟁이 반복되는 과정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를 테면, 일반적으로 시각예술은 아방가르드적 실험, 예술실천의 제도화, 대중적 수용의 과정을 거치는데, 이 과정에서 기존 형식은 새로운 형식과 끊임없는 경쟁관계에 놓이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20세기에 이르러 기술매체가 이 경쟁관계의 핵심적인 변수가 되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사진과 같은 복제 이미지가 보급된 이후로 시각예술의 기술적 생산조건이 예술의 생산, 유포, 기능과 역할을 재규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1930년대 중반,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논의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는 초기 영화에 대한 분석을 통해 새로운 매체가 지닌 미학적 정치적 가능성을 논의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예술은 현대적 지각방식을 미리 제시하고 그것을 훈련시켜주는 수단으로서 과거의 향수보다는 미래를 향해 있다. 요컨대 기술적 생산조건의 변화에 새로운 예술관념은 물론 사회변화의 동력이 잠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기술매체의 중요성이 인식됨에 따라 기술매체 자체와 기술매체를 토대로 한 문화형식의 미학적 의미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벤야민이 영화를 통해 현대적 지각방식에 대한 연습수단을 발견했다면, 마셜 맥루언(Marshall Mcluhan)은 텔레비전에서 정보의 민주적인 확산과 정치적 참여의 가능성을 보았다. 그리고 빌렘 플루서(Vilem Flusser)는 디지털 매체를 쌍방향 소통이 가능한 새로운 인지형식의 맥락에서 다루었다. 이러한 매체미학적 사유는 컴퓨터 기반의 매체환경과 뉴미디어 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실제로 우리 주변의 뉴미디어는 전통적인 매체가 갖지 못한 새로운 개념들을 내포하고 있다. 컴퓨터 그래픽을 바탕으로 한 현실의 시뮬레이션, 그리고 그 시뮬레이션 화면과 사용자의 상호작용, 가상현실과 인공지능 등은 이미지 체험의 다음 단계에 대한 다양한 물음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디지털화된 영화와 컴퓨터 게임은 매체환경의 변화와 그에 따른 쟁점을 단적으로 예시해준다. 먼저 최근의 디지털 영화가 보여주는 ‘만들어진’ 영상은 가장 발전된 형태의 시각 이미지를 보여줌으로써 ‘현실적인 가상’에 대한 물음을 갖게 한다. 컴퓨터 그래픽과 디지털 액터가 적용된 3D영화는 사실상 현실을 재현하기 보다는 가상을 현실처럼 시뮬레이션하는데 가깝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영화는 디지털 환영주의의 미학을 달성한다. 그리고 한편으로 컴퓨터 게임은 문학, 사진, 동영상, 전화, 가상현실 등 대부분의 매체를 전유하고 재매개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게임은 기본적으로 사이버스페이스로 불리는 가상공간과 실제공간에 위치한 사용자간의 물리적 상호작용에 의해 규정된다. 영화가 사실주의적 모델을 지향해왔다면 게임은 상호작용적 모델을 지향해온 것이다. 따라서 게임의 경우, 화면 자체의 사실성에서 한 걸음 나아가 사용자와 다른 사용자의 관계까지 포함하는 다양한 차원의 실제 효과를 추구하는 매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디지털 영화와 컴퓨터 게임은 현 시점의 매체환경에 내재한 특성과 함께 기술의 방향성, 매체와 인간의 관계 등 뉴미디어 문화의 미래에 관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 얼마 전 <디어시티 서울 2012>에 소개된 <가상 세계의 끝>
   
 

그러므로 기술이라는 변수를 선점한 디지털 영화와 컴퓨터 게임은 상당부분 기존 예술의 위기를 가리킨다. 이 막강한 두 가지 형식은 과거 예술이 해왔던 역할, 즉 재현과 시각적 스펙타클, 상호작용과 몰입 등의 주요 미학을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중적인 영상매체와 별개로 전통적인 예술형식 또한 새로운 기술과 조응하며 변화를 모색해왔다. 특히 20세기 초반의 역사적 아방가르드와 60년대 이후의 현대미술을 관통하는 유물론적 미학은 기술적 생산조건과 자신(예술)의 관계를 주체적이고 의식적으로 살필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해준다. 미디어 아트는 바로 그러한 관계 속에서 형성된 예술형식으로 이야기 할 수 있으며, 자본이나 문화산업의 논리와 거리를 둔 채 기술과 미래사회에 대한 비판적 사유를 담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앞서 다룬 문화형식과 구분된다. 예컨대 얼마 전 《미디어시티 서울 2012》에서 소개된 적 있는 로버트 오버벡(Robert Overweg)의 <가상 세계의 끝(The End of the Virtual World)>(2010) 시리즈는 컴퓨터의 게임 이미지를 일종의 레디메이드로 차용함으로써 가상공간 틈, 잡음, 몰입이 깨지는 순간과 같은 것을 포착해낸다. 특유의 미학적 전략을 통해 효과적인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살펴본 바와 같이 디지털 영화와 컴퓨터 게임, 그리고 미디어 아트는 각각 미래가 이미 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오늘날 이 세 가지 문화형식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팽팽한 경쟁관계 속에서 잠재적 미래를 나타낸다. 그런데 이 과정에는 첨단기술의 가능성뿐만 아니라 기술이 초래할 미래의 어두운 측면까지 포함되어 있다. 문제는 뉴미디어가 우리에게 새로운 지각방식과 다양한 정보를 매개하는 만큼, 컴퓨터 자체의 은밀한 영역 또한 확장된다는 사실이다. 그 어떤 가능성이든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