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고 열풍의 세대교체

매스미디어와 함께 ‘대중문화’가 등장한 20세기 초반부터 지금까지 음악과 영화, 텔레비전은 늘 세대의 관점으로 환원되곤 한다. 특히 서양에서는 1960년대 록으로 대변되는 하위문화가 폭발한 후 정치, 경제, 사회뿐 아니라 ‘문화산업과 수용자 사이의 관계’로 심화되어 조명되었다. 요컨대 이런 시도는 다음과 같은 명제, ‘록은 젊음의 음악’ ‘아이돌 팝은 소녀의 취향’ ‘트로트는 중년의 음악’ 등으로 설명되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세대에 따라 특정 장르나 스타일의 소비가 존재한다는 추측은, 연구가 진척됨에 따라 일종의 편견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청년 세대가 대중문화를 가장 활발하게 소비하는 계층이지만, 그렇다고 다른 세대가 문화산업과 동떨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서양에서 영화산업과 텔레비전, VTR, 로큰롤 등이 주류와 하위문화를 포함한 대중문화의 지배적인 양식으로 자리 잡은 1980년대를 거치면서, 세대 문제는 산업적 관점에서 보다 첨예하게 드러났다. 바로, 청년기에 이런 문화를 접한 세대가 나이를 먹은 후에도 산업의 소비자로 유지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추억 #1 : 90년대는 문화 격변기였다

이런 관점은 한국에도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다. 특히 최근에 대중매체를 통해 1990년대가 소환되는 방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수년 전 유희열과 윤상이 재조명되던 것을 비롯해 작년 아이유 2집에 윤상, 이적, 김광진, 정석원 등이 참여한 것, UV의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오마주, 1990년대 중반을 배경으로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이 테마로 쓰인 영화 「건축학개론」, 최근 방송되었던 드라마 「신사의 품격」과 「응답하라 1997」이 대표적이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2006년 개봉하여 신드롬을 일으켰던 「라디오 스타」를 비롯해 작년 개봉작이었던 「써니」와 올 초의 「댄싱퀸」 등이 1980년대의 한국 사회를 스냅사진처럼 소환했던 것과 종종 비교되곤 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1990년대가 소환되는 방식은 1980년대를 소환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특히 「건축학개론」과 「응답하라 1997」을 비교할 때 보다 선명해지는데, 거기에는 1990년대 한국의 정치사회적 배경과 대중문화산업의 급격한 변화와 그로 인한 세대 간의 분화가 존재한다.

추억 #2 : ‘첫사랑’ 대학생, ‘빠순이’ 고등학생

「건축학개론」의 이야기는 1995년으로부터 시작된다. 여러 매체로부터 ‘90년대 학번들에게 바치는 청춘의 습작’이라고 불릴 만큼 90년대 초중반에 대학에 입학한 세대들의 깊은 공감을 얻었다. 전람회가 데뷔한 1993년과 1집을 발표한 1994년에 막 20대에 진입한 세대를 겨냥한 이 영화는 서태지와 아이들로부터 충격적인 10대의 감수성을 경험한 세대로, 20대가 되어서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쿠엔틴 타란티노 등으로부터 ‘다른 감수성’을 수혈받은 세대였다.

 
 
    △ 가슴속 '첫사랑'의 기억을 불러일으킨 「건축학 개론」
   
 

 「신사의 품격」은 이들이 중년이 된 현재의 삶을 보다 직접적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건축학개론」과 자매품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응답하라 1997」이다. 이 드라마에는 1997년에 18살이었던 남녀 주인공(현재 이들은 33살이다)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소환하는 1990년대는 「건축학개론」이나 「신사의 품격」이 불러오는 것과는 다른 질감의 90년대다. 단적으로 말해 여기에는 서태지와 아이들 대신 H.O.T.가 등장한다. 그 차이는 「건축학개론」이 비슷한 시기의 ‘대학생’을 주인공으로 삼았던 것과 달리 「응답하라 1997」은 ‘고등학생’을 등장시키는 것과도 연관된다. 1980년대를 다뤘던 「라디오 스타」나 「써니」, 「댄싱퀸」등에 비해(‘쎄시봉’으로 호명되던 1970년대도 마찬가지다) 두 작품은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는다. 요컨대 한국의 1990년대는 동일한 정서로 묶이지 않는 것이다.

 
 
   △ 일명 '빠순이'라는 팬 문화를 추억하는「응답하라 1997」
   
 

추억 #3 : 서태지와 아이들과 H.O.T의 간극

이 상황을 이해하려면 더 복잡한 지도가 필요하다. 적어도 1990년부터 1998년 사이에 한국의 대중문화산업은 유사 이래 가장 빨리, 그리고 보다 복잡하게 변화했다. 1987년 6월항쟁의 결과로 노태우 군부가 대통령 직선제를 표방한 6.29선언을 했고, 그 후 가속화된 민주화 논의는 1989년 해외여행 자율화 조치와 1990년 민영/케이블 방송사 설립을 허용한 방송법 개정, 일본문화 순차 개방 논의를 비롯해 1991년 김영삼 문민정부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이런 배경에서 IMF 이전까지 대중문화산업은 급속하게 변화했는데, 하다못해 서태지와 아이들과 H.O.T. 부근에는 전람회뿐 아니라 윤종신과 015B,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남자 셋 여자 셋」과 종로의 코아아트홀과 영화잡지 「키노」와 크라잉 넛과 자우림과 기타 등등의 온갖 대중문화 상품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특히 이 시기의 문화적 경험은 모두 다른 맥락에서 태어나고 다른 영역에서 소비되며 결과적으로 다른 경험을 향유했다는 점이 중요할 것이다. 이 경험의 차이가 각각 구분 가능한 지점을 형성하는데, 덕분에 비슷한 시기를 보낸 사람들을 특정 세대(요컨대 90년대 세대)로 호명하기 어려워진다. 특히 교과 과정이 3년 단위로 짜인 한국에서 90년대의 가속도는 중학생과 고등학생과 대학생을 아예 다른 세대로 구분하도록 만들었는데, 이런 관점으로 현재 「건축학개론」과 「응답하라 1997」에 반응하는 연령대를 살펴봐도 좋을 것이다. 그들이 바로 지금의 문화산업이 ‘지속적인 소비 집단’으로 ‘설정’하려는 자들인데, 그나마 호황기를 겪은 세대라서 가능하다는 생각도 든다. 5년쯤 지나면 아마 피카츄를 보고 자라 카카오톡으로 연애하는 청년 세대가 서른이 넘도록 실업자로 사는 얘기가... 아, 너무 우울하니 그만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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